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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단상] 올해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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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남반구 아랫부분에 불이 붙어 겨우내 지구를 덮혀서인지 아니면 지구온난화의 결과인지 올겨울은 다른 해에 비해 참으로 따뜻했다. 밖에서 일하시는 분들 들으시면 화내시겠지만...

그나저나 악몽 같았던 호주의 산불은 지난 6개월간 하릴없이 지속되었는데, 올해 2월 14일에 호주 산불 방재청에서 공식 종료를 선언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데 지난 6일부터 쏟아진 폭우로 일부 지역에서는 홍수 피해가 나기도 했지만, 남은 산불을 잡는 데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남한 면적 크기의 땅이 불에 탔고, 6500 여개의 건물이 사라지고 그 와중에 33명이 목숨을 잃었다. 호주의 대표 동물인 코알라를 비롯한 야생동물들도 10억 마리 이상 죽었을 것으로 추산한다고 하니, 호주로서는 100년 만의 최악의 가뭄 끝에 무시무시한 화재의 재난이 겹쳤던 지옥 같은 시간이었던 을 것 같다.

남쪽 지방에 살다 보니 바로 인근 도시는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 내가 사는 도시는 그래도 한두 번씩은 쌓인 눈 때문에 애를 먹어야 겨울을 나곤 했는데, 올해는 웬일인지 2월 중순이 되도록 눈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1월에도 계속 겨울비만 내렸고, 비가 내린 후에도 그렇게까지 추워지지 않았다.

3 한 4온의 한국 겨울의 특징은 어느덧 사라지고, 날씨가 포근한 겨울날에는 미세먼지가 극성을 피웠다.

저물어 가는 초 저녁의 하늘빛은 미세먼지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색들의 대비를 이루며 사진으로 담아두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게 만들곤 했다.

 

평생을 겨울이면 눈을 보고 살아왔기에, 눈이 없는 겨울의 이미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고정관념이자 습관의 힘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으로 눈이 없는 겨울을 나는가 싶었던 올겨울은 뭔가 허전하고 찜찜했다. 늘 일 년 내내 너무 덥거나 춥지 않은 봄 가을 같은 날씨가 계속되는 곳에서 살았으면 바랬으면서도...

지난주에도 갑자기 툭 떨어진 기온에, 을씨년스러운 찬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꼭 눈이 올 것 같은 분위기이더니 주책스럽게도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었다. 그땐 왠지 배신당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2월 중순도 지나, 어느덧 3월을 눈앞에 둔 어제... 드디어 눈 소식이 들린다.

사실 눈이 많이 오면, 교통문제가 제일 심각해진다. 특히나, 남쪽 지방 사람들은 눈이 쌓인 도로 위를 달려 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도로 위의 정체가 위쪽 지방보다 더 심하다.

결빙 지역도 생겨 교통사고도 많이 발생하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기다리는 마음은 뭔가 싶다... 애들도 아니구.

https://coupa.ng/bqDIrj

 

장거리 출퇴근하는 동료가 새벽 출근길 산 등선을 넘어올 때 폭설이 내려 앞이 안 보일 지경이라 하길래, 이쪽 지역은 그냥 하얀 눈발만 날린다고 얘기했었다.

오전 내내 햇살도 내리쬐고 구름이 절반 정도 하늘을 가린 상태에서 간간이 하얀 눈발을 흩뿌렸다. 그거라도 어딘가 싶어 신기한 듯 가끔씩 밖을 내다보곤 했다.

갑자기 구름들이 한껏 몰려오더니 제법 눈발이 굵어지고 많아진다. 제대로 된 눈발을 기어이 한 번은 보는구나... 그렇게 올겨울을 마무리하려나 보다...

하지만, 금세 구름이 걷히고 다시 햇살이 기웃거린다. 제법 흩뿌렸던 눈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비라도 부슬거리며 내렸다면, 도로가 젖어 있을 터인데... 눈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언제 눈이 왔냐는 듯,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한참 뒤에 문득 밖을 쳐다보니 제법 본격적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멀리 공사 중인 아파트 부지 땅 위에도 어느샌가 하얀 눈들이 쌓여 있다. 부지불식간에 세상을 하얗게 물들여 버린 자연의 힘에 문득 숙연한 마음이 든다.

겨울... 눈...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는 세상이 불러일으키는 설명하기 힘든 이 느낌.

스러져가는 겨울의 마지막을 붙잡고, 아직은 겨울이라고... 추운 겨울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눈과 연관되어 있는 온갖 추억과 감정들이 칵테일처럼 뒤 섞여 정체 모를 감정을 만들어 낸다.

제대로 쏟아지는 올해 첫눈을 바라보며 다들 무슨 생각을 할까?

연인들은 분위기를 즐기며 데이트할 생각에 들떠 있을지도... 눈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정신없이 눈을 맞으며 뛰어놀고 있을지도... 눈 속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분들은 걱정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30분도 안 되어,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세상을 하얀색으로 바꾸어 버리는 자연의 놀라운 힘에 숙연해진다.

구석구석을 파괴해가며 지구의 모양을 조금씩 바꾸어가는 과학기술이라는 무소불위의 힘을 장착한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이런 자연의 능력에는 언감생심이다.

쏟아져 내리는 하얀 눈을 바라보며, 마냥 즐거워만 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문득 이질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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