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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

예술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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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없는 삶(2017)이란 영화가 있다. 아름다운 숲을 배경으로 한 영화포스터에 눈길이 끌려 서정적인 내용의 드라마를 기대하며 사전정보 없이 보게 된 이 영화는, 전후 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 곧바로 배우들의 표정연기로 그들의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영화 초반, 초록으로 둘러싸인 울창한 숲속... 부녀지간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와 앳띤 얼굴의 여자는 도망자들처럼 숨어다니며 기이한 행동들을 계속한다.

처음보는 낯선 배우들이 뿜어내는 스릴러물 같은 분위기가 보는 내내 불안하기 그지없게 만들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 영화는 미국 포틀랜드에 위치한 광활한 삼림지역에서 수년간을 숨어 지내온 10대 소녀와 아버지의 삶을 따라가는 내용이었다.

영화 속에서 암시하는 대로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얻은 트라우마로 보통사람의 삶을 살아갈 수 없었고, 딸은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는 아버지와 함께 공동체를 피해 힘든 삶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작은 실수로 그들의 삶이 발각되어 사회복지국에 의해 공동체로 강제 편입되긴 했으나, 결국은 적응하지 못하고 또 다시 뛰쳐나가는 과정에서 산속에서 부상을 입으며 얼어 죽을 위기에 처한다. 개인의 속사정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 시스템의 폭력에 또 다시 희생되어버릴 순간이었다. 다행히, 세상을 등지고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나긴 한다. 이 소공동체에 머물기를 희망하는 딸은 또다시 고립을 자처하는 아버지와 헤어지는 선택을 한다.

영화 내내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각자는 모두 제 위치에서 선의를 가지고 주인공 부녀를 돕는다. 세상엔 나쁜 사람들도 많지만, 훨씬 더 많은 좋은 사람들이 있는 건 분명하다. 우리 공동체가 망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우리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선한 사마리안이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다.

상대방의 표정 속에서 그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는 게 비록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결국은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결별을 선택하는 딸... 그녀의 무표정속에서 생각을 읽어보려 애썼지만, 퇴화되어 가는 내 감성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오랜 시간 심정적으로 의지했던 사회생활 능력이 없는 아빠... 하지만 언젠가는 헤어져야 함을 알고 있었던 딸이 그런 아빠를 떠나보내는 심정이란...

느린 템포의 영화를 보는 내내 자연스레 머릿속을 떠돌던 여러가지 생각거리들은 엔딩크레딧과 함께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도데체 뭘 말하고 싶은 걸까?

타인의 시선이 궁금하여 여러 영화평들을 뒤져보았다. 그러다 내가 궁금해 했던 점들을 콕콕 집어서 그럴싸하게 해설해 놓은 블로그를 발견했는데, 마치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표정연기의 순간들에 대한 감정과 속내에 대한 해석을 글로 풀어 놓았다. 물론 정답이 아닐지 몰라도, 내겐 더 없이 그럴 듯 해 보였다.

' 같은 시간동안 영화를 보면서도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충만한 경험을 했음에 틀림없어 보였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의 감성이 내심 부러웠다. '

 

예술은 우리 삶에서 절대 떼어낼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나 음악은 우리 삶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어, 그 누구도 음악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좋아하는 장르는 달라도 음악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힘든 삶을 지탱해주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에 반하면 미술은 꽤나 난해한 구석이 있는 듯하다. 부자들의 탈세나 돈세탁 수단인 것처럼 오명이 덧씌워져 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 아무런 거리낌 없이 즐겨 그리던 그림은 어른이 된 후로는 직업이나 취미생활로 가까이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원한 분야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시를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그 작품들과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나 감성이 부족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도스토옙스키가 왜 대문호라 추앙받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나를 깨우쳤던 오종우 교수의 책 <신은 우리 곁에 있는가>을 읽은 후, 많지 않은 그의 저서들을 모두 훑어보게 되었다. 내 부족한 감성을 조금이나마 채워주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였지만, 감성이란 게 책 한 두권으로 개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예술수업>은 책 속에 QR 코드를 넣어두어 연관된 음악을 바로 들으면서 설명을 들을 수 있고, 강의체로 쓰여져 있어 마치 강의실에서 교수의 수업을 직접 듣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눈높이를 낮춰 쉽게 해석을 해 준 점도 마음에 들었다.

작가는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성균관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이 책의 기반이 된 '예술의 말과 생각'이라는 강의는 성균관대학교 최고의 명강으로 꼽히어 티칭어워드(SKKU Teaching-Award)를 수상했다고 한다.

이 책에는 도스토옙스키와 체호프, 피카소와 샤갈, 셰익스피어와 타르콥스의 영화, 베토벤 교향곡과 피아졸라의 탱고가 흘러넘친다. 천재들의 빛나는 사유와 감각이 폭발하는, 예술이 주는 감동의 순간으로 안내해주는 책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낯선 여행지에서 운 좋게 만난 친절한 가이드처럼, 작가는 자상하게 예술수업의 가이드를 해낸다.

                                                출처 : 어크로스. 예스24. 오종우 저.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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