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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

개인주의자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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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상위 몇 프로의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태생적으로 그들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저자가 나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 보려한 한국사회의 적나라한 자화상들이 책 구석 구석에서 에누리 없이 펼쳐지곤 한다.

최상위 엘리트 집단들의 대화내용에서 전해지는 그들만의 리그와 피 말리는 출혈경쟁은 새삼 모골이 송연하다.

하프를 전공한 어느 사모님이 수학과 교수인 부군을 제치고 자녀 수학 선행학습 스케쥴을 짜고 있었고, 발레를 전공한 어느 사모님은 미국 박사 출신인 부군을 제치고 애들 영어 웅변대회 수상경력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들...

"그래도 공부 하나만 불균형하게 잘하는 애가 되지 않도록 이것 저것 많이 시키고 있어요"

"맞아요, 이 글로벌 시대에 외국어 실력, 세련된 매너, 수준 높은 교양, 원만한 성품...얼마나 갖춰야 할 게 많아요?"

"글로벌 리더가 되려면 창의적 인재여야지 교과서 달달 외워서 시험만 잘 치는 기계가 되면 안되죠."

"우리나라도 이제 안정된 사회인데 더이상 평지돌출로 상고 출신 대통령이 나오고 이러면 안 될것 같아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면 인성이 불균형 할 수 밖에 없죠."

P84

그만큼 많은 투자와 노력을 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원하는 건...어찌보면 인지상정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타인의 인정을 강렬하게 원하는 존재들 아닌가...하지만, 무엇을 위해 이런 치열한 노력을 경주해 왔는가에 대한 전인적인 고뇌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선에서의 선택이 전제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쩌면 이들은 자기자신밖에 모르는 엘리트 괴물들을 키워내는 중인지도 모른다. 스스로는 아주 훌륭하게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키워나간다고 자부하겠지만 말이다.

 

인간은 자기경험의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공공의식이 부족한 엘리트는 사회에 오히려 더 큰 해악을 끼칠수 있다는 점... - P93

자기경험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나이 40만 넘어도 꼴통 보수가 되어 말귀가 막혀버린 사람들 부지기수이다. 이러한 면을 고려해보면, 상위엘리트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기대할 수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들만의 리그 속에 매몰되어 있는한 리그 밖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기란 어려운 일인데다, 그들에게 그럴만한 이유도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경쟁 자체는 피할 수 없는 것...공교육 강화, 기회균등 전형 확대, 수시 중재력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의 규제, 취업시장에서의 학벌주의 탈피 등...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없어진 신분제 사회는 자멸로 가는 길이라는 역사적 교훈과 입시제도에 있어 돈과 정보력의 영향을 최소화하여 공정한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

막상 내 아이가 대학에 갈 때 즈음이 되니, 학교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들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했었다. 극성 사모님들의 치맛바람과 여기저기 풍문으로 들려오는 카더라 하는 얘기들... 불신사회 속에서 살아온 경험칙은 무대 뒤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을거라는 두려움의 싹을 부지런히도 키웠다. 학교에서 누구 누구를 대 놓고 밀어주고 있다는 등, 누구는 어떤 선생님과 무슨 관계라는 등 누구는 선생님들을 모시고 골프접대에 저녁식사 접대까지 했다는 등... 소문은 진실여부를 떠나 그럴싸한 사실인 것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가장 순수하게 우정을 쌓아가야 할 시기에 친구들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현실의 흉포함. 이를 견디지 못한 학생들의 일탈도 실제로 몇 명 목도했다. 일찌감치 포기한 학생들의 좌절과 중도탈락으로 힘겨워하는 학생들. 다양한 재능을 지녔을 애들을 오직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학교.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을 가지고 있는 민족인데... 기를 쓰고 좀 더 나은 성적을 위해 매진하는 상위권학생들과 일찌감치 중위권 이하로 밀려난 학생들이 한 지붕밑에서 생활하는 괴기스러운 학교내 풍속도... 그나마 자사고나 외고 등 소위 최상위 그룹의 고등학교는 학내 면학분위기가 제대로 잡혀는 있으나 이곳의 출혈경쟁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알려져 있다. 소득 불균형과 마찬가지로 교육현장의 실태도 극과 극이다.

 

 

사회로 진출했을때 어차피 겪게 될 적자생존의 처절한 출혈경쟁이 학생단계로 내려갔다해서 뭐 그리 대수인가...어짜피 인생이 그런거 아닌가?...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된 걸까?

우리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애들을 공부로 닦달하는 잔인한 세대가 되었을까?

교육에 대한 부분이 역시나 가장 공감이 되는 부분 중 하나이다. 저자의 관심사는 의외로 전방위적으로 다양하다.

인간이 그렇게 역사 내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웠다면 어떻게 갑자기 노동계급에 대한 헌신과 희생정신에 불타는 전사로 돌변하며, 당은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은 채 인민을 위해 헌신하고, 사람들은 사유재산과 이윤동기 없이도 모두를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이라는 말인가. 그게 근본적으로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 과학적인 설명이 너무나 부족했다... - P100

지난 시대의 기준을 들이댄 '세대론'으로 현재를 완벽하게 설명하려 드는 건 어리석다...처한 입장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다른 다양한 개인들을 '세대'라는 카테고리로 묶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

한때 내가 갈팡질팡 길을 헤매며 고민하던 것들에 대해 시원스레 일갈하는 저자의 일성이 부럽다. 일면 주관적이고 일면 편협한 결론일지라도, 저렇게 자신감 있게 사회현상을 진단하고 타인들에게 표출할 수 있는 패기가 부럽다. 인문계 사람들의 특성이라 할 만한 말빨만 쎈게 아니라 글빨도 장난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주의"라는 용어는 우리사회에 경착륙하면서 아주 희한한 뜻으로 변질되어 버린 대표적인 단어이다. 내 학창시절, 선생님들은 왜 "미국사람들은 개인주의여서 자기 자신밖에 생각 안한다"는 근거도 없는 얘기를 한창 감수성 예민한 학생들에게 그렇게 당당하게 말했을까? 개인적인 공간을 서로 존중하며 배려하는 문화가 개인주의의 일면일터인데, 마치 타인과의 교류를 차단하고 사는 히코코모리처럼 개인주의를 매도한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은 좋은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개인주의자 선언>은 나에게 꽤나 좋은 책이다.

자신의 신념대로 확실하게 분열되어 있는 한국의 실정에서, 이 책을 읽으며 비분강개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각자의 생각과 행동은 각자의 몫이다...

 

                                             <사진출처 : 문학동네. 예스24>. 2015년 9월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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