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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

남한산성. 김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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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대표작은 2001년 '동인 문학상'을 받은 <칼의 노래>일 것이다. 드러나 있는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이 녹아든 '비역사성을 품은 역사소설'로써, 순결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고뇌와 사유들을 사실감 있게 재현해 냈다는 평가였다.

<남한산성> 또한 그 흐름을 이어간다. 그의 문체는 짧은 호흡으로 이어지지만 매우 강렬하다.

 

175억이 투자됐다는 영화 <남한산성>은 손익분기점인 관객 500만 명을 넘기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배우들의 연기와 디테일한 묘사들이 꽤나 인상 깊었었다. 한창 은희경 작가의 책들에 빠져 있던 때 우연하게 도서관 서고 옆자리 꽂혀 있어 눈에 띈 이 책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손을 거쳤는지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인조실록>에서 발췌한 내용에 근거한 이 책에는 병자년 이 땅을 짓밟았던 거대 악에 무릎 꿇었던 약소국의 비참했던 고통의 순간들이 날것 그대로 아로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 서문에 쓰인 작가의 말이다. 당나라 사람 조송은 ‘장군하나 되려면 뼈다귀가 만개나 말라야 한다.’고 한탄했더랬다.

사람 취급 못 받던 힘없는 민초들의 고단한 삶,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상황에서도 알량한 명분만을 좇는 무뢰배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자신의 앞길만을 생각하며 박쥐같은 삶을 추구하는 간신배들의 졸렬함이 길지 않은 문장들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대단한 필력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몸부림 쳤을 창작의 고통이 느껴진다.

혹한의 겨울이었던 병자년의 남한산성에서는 수없이 많은 군졸들이 상하고 얼어 죽었을 것으로 작가 김훈은 상상했다. 적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려 그 추운 날씨에 모닥불조차 피우지 못했을 밤과 새벽, 병장기조차 제대로 감아쥘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손과 발들. 고통과 두려움... 상상만으로도 벌써 온 몸이 아려온다..

영화 <남한산성>은 원작과 몇 가지 부분이 달랐는데, 가져온 대사들은 거의 책에서 원용한 듯 했다.

유연한 대외정책을 고수했던 광해를 폐하자 이를 핑계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였고, 치욕스럽게 형제관계를 맺으면서 정묘호란은 일단락된다. 광해를 폐하고 인조를 옹립했던 신하들은 국운이 다해 기울어가는 명나라에 대한 알량한 사대주의를 내세워 주화파와 척화파로 나뉘어 싸움질이었고, 이는 후금에서 국호를 바꾼 청나라에게 침입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12만 대군의 기세에 몰려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에 50여일분의 식량과 1만여 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갇혀버린 조선 조정 군신들. 인조실록 속에 기록된 무능하고 참담한 역사가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깜량도 되지 않으면서 알량한 사대주의 대의명분만을 좇다가 수많은 민초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포로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게 했던 지도부. 한줌도 되지 않는 이 인간 군상들은 막판 궁지에 몰리자 왕에게 모든 결정을 미룬다. 결국 인조는 "나는 살고자 한다."며 자신의 추레한 속내를 드러내고 오직 살고자 치욕적인 삼전도의 굴욕을 받아들인다.

아무런 권한도 없는 민간인에 의해 국정농단이 발생하고, 무책임한 최고 권력자 밑에서 요령껏 호의호식하던 인간들이 넘쳐났던 나라. 그 잘못에 대한 통렬한 반성도 없이, 무늬만 다른 겉 옷을 걸치고서 오늘도 생떼를 쓰는 무리들이 버젓이 지도자입네 행세하는 나라가 소설 <남한산성>에 겹쳐 보인다.

우리네 역사는 소라형으로 돌면서라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치욕적인 역사를 뱅뱅 돌며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걸까.

                                             <출처 : 학고재, 예스 24> 김 훈 저.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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