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여행

소립자

반응형

‘소립자’의 사전적 의미는 극 미립자라고 생각되고 있는 광양자, 전자, 양성자, 중성자, 중간자, 중성미자, 양전자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광양자, 중간자, 중성미자 등등은 내겐 처음 들어보는 단어이자 개념조차 없는 단어이다. 감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아마도 과학자들의 이론 속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알갱이일것이라 추정할 뿐...

<소립자>란 책 제목에선 뭔가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매력적으로 전개될 거라 지레 짐작했다. 하지만, 정작 책의 내용은 읽다가 가끔씩 주변을 힐끔거려야 할 만큼 포르노 못지않은 직설적인 성적묘사로 넘친다. 괴짜 취급을 받는 한국 성 문학의 대명사인 마광수 교수의 필화 사건이 문득 떠올랐다. 이 불쌍한 교수는 재판을 거쳐 실형을 살고 나와 이후 복직되었지만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단 한줄의 요약이지만, 개개인의 견뎌내야 했을 비참함과 울분의 시간들은 차마 짐작하기조차 힘들다.

그의 작품들은 그리 예술적이지도 않았지만 법의 심판을 받을 정도로 사회풍속을 해친다는 생각은 개인적으로 들지 않았다. 그 정도로 우리들이 미숙하고 계몽받아야 할 존재들이라 판단하는 재판부의 결정이 의외일 뿐...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인터넷 상의 온갖 동영상들에 비해 더할 것도 덜 할것도 없는 수준인 듯 한데... 어찌 됐든 한 개인의 삶은 무참히도 망가진 듯 하다. 미셸 우엘벡이 프랑스에서 그런 대접을 받았을 리는 없겠지만. 성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인 프랑스에서도 <소립자>는 출간된 해에 크게 논란이 됐던 작품이라 한다.

책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너무도 강렬하다. 어찌하여 작가는 이렇게도 지독하게 성에 탐닉하는 모습으로 고통에 찬 서구인의 삶을 표현하려 했을까하는 의구심에 마지막 책장에 실린 작가연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고산지대 안내원인 아버지와 마취과 의사인 어머니, 행간에 뭔가 유럽인의 낭만적인 사랑얘기가 있었을 법하다. 하지만, 열정적인 사랑도 6년이 지나지 않아 시들어 버리고, 이혼이라는 파국으로 작가 우엘벡은 할머니에게 맡겨진다. 할머니가 정성으로 키웠겠지만 부모의 빈자리를 다 채울 수 없음은 누구나 예상하는 바일 것이다. 우엘벡은 22세 때 결혼하고 1년 만에 이혼한다.

결손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엘벡의 경우는 적지 않은 고뇌에 시달렸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혼 후 한때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그의 인생과 사유의 결정체들이 소립자라는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이었던 소립자는 처음 읽어 나갈 때는 싸구려 포르노 소설처럼 느껴졌지만, 에필로그의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부터 받은 충격을 안고 다시 찬찬히 읽어 보니 아슬아슬 벼랑길을 올라가는 위태로운 현대인들의 적나라한 자화상이다.

소립자는 너무나도 다른 두 형제 미셸과 브뤼노를 두 축으로 얘기를 전개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얘기는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며 성에 탐닉하는 브뤼노에게 집중돼 있다. 아이들은 당연히 부모를 보면서 따라하고 또 닮는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소년 우엘벡은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불행한 소설 속 주인공 미셸과 브뤼노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나? 살아남기 위해 각인된 생존의 법칙이 때로는 우리를 불필요한 고통으로 옥죄곤 한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미셸은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작은 오해만으로 첫사랑에게서도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성생활을 거의 하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미셸은, 오랜 세월이 지나 첫사랑과 재회해 잠깐 동안 함께 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반면 브뤼노는 성적 강박을 함께 할 크리스티안과 만나 행복을 거머쥐었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이 없는 성에 대한 끝없는 갈구는 예상했던 대로 참담한 결말로 치닫는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포함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번의 죽음들은 최대한 더럽고 추하게 묘사되며, 이를 마주하는 주인공들의 반응은 무미건조하고 서투르게 담아낸다.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인류에 대한 풍자를 통해 사랑이 없는 세계에 대한 천함과 비열함을 아프지만 통렬하게 꾸짖는다. 과학을 통해 창조된 새로운 종의 인간이 된 우엘벡이 에필로그를 통해 사랑할 줄 모르는 그럼으로써 자멸해가는 서구사회인들에 대해 신랄한 독설을 토해낸다. 인류의 시조라 일컫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라는 유인원을 생각할 때 우리가 미개인의 이미지를 떠올리듯 이 소설 속에서 새로이 창조된 생명체(작가) 또한 현 인류를 선의와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는 않았으나 원숭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묘사한다.

과도한 경쟁 속에 등 떠밀려 살아온 한국인들은 서로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배우질 못했다. 복지를 얘기하면 힘 있는 자들은 온 국민이 두드러기 반응을 보이는 붉은 색으로 덮어 칠해 버렸다. 로 된 공동체로서의 삶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현시대의 많은 한국인들은 같이 어울려 살아가는 삶에 생소하다.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을 서로 보호하고 감싸 안아 같이 살아남기가 아닌 약육강식으로만 잘못 해석한 탓이다.

물신에 대한 지나친 경배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따뜻한 인간애를 벼랑 끝으로 밀어내고 있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할 노령화 시대의 우리들에겐 모골이 송연해지는 얘기이다. 현대인들은 우엘벡이 소립자를 통해 보내는 사랑 없는 세상에 대한 경고를 가슴 깊이 받아 들여야 한다. 내 사무실 창문 옆에 놓인 작은 화초들은 내 조그만 관심만으로도 끊임없는 세포분열을 통해 지금도 쉬지 않고 잎을 키우고 있다.

                                            출처 : 열린책들, 예스 24. 미셸 우엘벡 저/ 이세옥 역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