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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

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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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파람북. 예스 24. 2020년 6월 15일

 

좋아하는 김 훈 작가의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잔뜩 기대를 갖고 읽었던 탓에, 상상했던 나의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느낌이었다.

()을 의인화하여 서술되는 부분이 많아서, 간혹 몰입이 깨지기도 하고 때론 방해를 받는 듯 했다.

하지만,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이란 책 제목이 말해주듯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말[馬]이었다...^^

 

역사 소설 3부작이었던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에서 선 보였던 비장하고도 묵직한 필체는 여전하다. 하지만, 순수한 창작물인만큼 김훈 작가의 작가적 상상력이 마음껏 펼쳐질 수 있는 작품일거라는 기대감을 안고 읽다보니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에 약간 김이 빠진 듯한 느낌을 벗어날 수 없다.

<왕좌의 게임>같은 대작들이 눈 높이만 잔뜩 올려놓았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공과 모든 수는 죽음과 삶 사이를 가른다.

그러므로 공에서 수로, 수에서 공으로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이 엎어지고 뒤집히는 틈새를 사람의 말로는 삶이라고 부른다.

 

--- p.23

 

여전히 김훈작가는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을 선보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는 비슷한 톤의 서술은 조금은 지리하면서도 못내 아쉽다.

구성은 탄탄한 편이고, 내용 전개는 상당히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환타지류의 소설임에도 주인공들은 모두 생로병사의 자연과정을 거스르지 않으며, 그 과정을 일부러라도 자세히 묘사한 듯 보인다.

 

전투씬들은 거의 대부분 생략되었고, 오히려 전투 후의 처참한 광경에 대한 묘사는 길다.

"이런 것까지?" 싶을 정도의 디테일한 묘사들도 꽤 많다.

 

@europeana/unsplash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쳐야만 흘러나올 멋진 문장들도 빼곡하다.

깨알같이 박아넣은 온갖 인간군상들의 모습들도 제법 신랄하다.

하지만, 큰 그림 속에서 주가 되는 갈등 구조는 그려넣지 않았다. 그저 적으로써 전쟁의 상대로써 무겁지 않게 묘사했을 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주인공인 두 말에 대해 꽤나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 관찰하거나 전문가에게 조언을 듣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사실들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굳이 소설 속에 꼭 집어넣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해가 수평선 쪽으로 내려앉고 바다와 하늘이 붉어지면, 비혈마들은 저무는 해를 향해서 달려갔다. 노을은 빛 속에 어둠을, 어둠 속에 빛을 품으면서 어두워졌다. 비혈마들은 어둠에 잠겨가는 마지막 빛을 향해 더욱 빨리 달렸다. 소멸하는 빛에 비혈마들은 조바심쳤다. 말들의 눈동자에 저무는 빛이 번득였다. 밤에 말들은 해안에 당도했다. 말들은 고개를 들어서 인광이 부서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안에서 말들은 건너갈 수 없는 저쪽을 향해 높이 울었다. 말들의 이마에 박힌 흰 점에서 빛들이 흔들렸다. 새벽에 말들은 초원으로 돌아왔다.

--- p.70

 

전체적인 스토리는 서사적인 소설을 원했던 독자라면 조금은 실망할 수도 있을 법하다.

한 두 문장이면 요약이 가능할 정도이니까...

글쓰기를 연습하는 사람들에겐 주옥같은 표현들이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오니 복기해도 좋을 듯 하다.

단문장으로 표현해 낸 풍광들이 상상을 돋우어 만들어내는 영상미가 기가 막힌 문구들이 많다.

 

나이들어 퇴장해야 할 시기가 되면 극노인들은 스스로 조각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

인생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britishlibrary/unsplash

 

수없이 많은 젊은 사람들이 전쟁통에 죽는다.

이들에 대한 묘사는 지극히 짧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 지도 모른다. 그냥 영토 확장을 위해 싸운다.

 

산 자는 죽은 자를 이길 수 없었다. 죽은 자는 이미 죽었기에 죽일 수가 없었고, 죽어 널브러지고 문드러진 자세로 산 자를 조롱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영광에 침을 뱉고 있었다. 적병과 아군의 시체가 뒤엉켰지만, 죽은 자에게는 산 자의 칼이 닿지 않았다.

--- p.115

 

작가적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역사임에도, 모든 것들이 정확히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는 말로 자세한 서사를 얼버무린다.

그러면서도 자질구레한 디테일들은 과분하게 많다.

그러다보니, 읽는 내내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문장의 간결함과 아름다움에 책 읽기는 수월한 편이다.

 

책의 첫 페이지에 이 소설의 배경을 설명하는 지도가 나온다.

바다로 이어지는 나하라는 강이 동서로 나누는 이 땅에는 북쪽에 초(草)와 남쪽에 단(旦)이라는 두 거대세력이 있고, 초승달을 향해 밤새 달리는 신월마(新月馬)태생의 토하라는 말과 달릴때 핏줄이 터져 피보라를 일으킨다는 비혈마(飛血馬)혈통의 야백이라는 말이 나온다.

 

두 말[馬]을 통해 본 인간 세상의 참혹하고 허망한 전쟁을 통해 '문명과 야만의 뒤엉킨 모습과 거기에 저항하는 생명의 힘을 말하려 했다.'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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