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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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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교유서가. 예스 24

 

소설가 한창훈은 거문도 태생이다. 여수로 유학을 나오기 전까지는 망망대해 속에 작은 땅을 지닌 섬 거문도에서 시퍼런 하늘과 바다을 바라보며 자랐다. 거문도 주변의 바다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휴양지의 바다와는 질감이 다를 터이다.

 

삶을 지탱하기 위해 섬의 남자들은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갔을 것이요, 여자들은 얼마되지 않는 밭뙈기와 가파른 언덕배기에서 먹을 만한 것들을 캐내곤 했을 것이다. 그리 넉넉하지 않았을, 아니 어쩌면 지지리도 궁핍했을 섬 생활은 삼시세끼 어촌편에서 보는 도시인들의 로망에 찬 모습과는 전혀 달라보인다.

 

빈 주먹 움켜쥐고 거문도를 떠나, 육지에서 신산한 삶의 희로애락을 맛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거문도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귀신 나온다는 폐가로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그의 그런 행동으로 난 공연히 그가 싱글일 것으로 착각했다.

 

@amandabereckonedwith/unsplash

 

하지만, 이번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라는 책에는 그의 딸 얘기가 여러번 나온다. 아내에 대한 얘기는 내 기억엔 없다.

 

작가임에도 날을 새고 글을 써 본적이 없다고 당당하게 밝히는 것은 또 무슨 심뽀인고 싶기도 하지만, 딸의 시각을 통해 빗대 놓은 작가로서의 아빠 얘기는 재밌기도 하다.

 

책 제목을 곡해하여 한창훈 작가 나름의 글 쓰는 것에 관한 소회나 전문가로써의 글쓰기에 대한 철학 등에 대한 내용인 줄 알았다. 요즘 들어 건성으로 보고 듣고 오해하는 일이 갈수록 잦아지는 것 같다.

 

문학을 키우는 것은 비문학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한 창훈

 

한창훈 작가를 알게된 건 우연히 접한 그의 첫 작품 <홍합>에서였다.

 

익히 알고 있는 지역정서와 사투리로 버무려진, 평생 고된 노동으로 일관한 바닷가 사람들의 삶을 그려낸 이 작품은 거의 대부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작품을 끌고 가는 스토리의 중심에는 대부분 아낙네들이 있었다.

 

팔자 좋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지지리 궁상맞고 초라해 보이는 삶일지는 몰라도, 가슴에 응어리들이 질 법한 수 많은 삶의 편린들을 부둥켜 안아삼키고 겉으로는 걸쭉한 농담과 쉴새 없는 웃음으로 대신하는 그네들의 태도를 한창훈의 글이 아니었다면 그 깊이를 감히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다.

 

길게 배우지 못했지만,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리만큼은 제대로 배웠던 그녀들은 한결같이 부족하거나 혹은 과하게 설쳐대는 고약스런 남편들을 가장으로 모시고 살았고 그런만큼 삶은 더 힘겨워 보였다.

 

@profwicks/unsplash

 

도시인의 삶에만 맞추어진 내 시각에서 보자면 참 질펀하고 고된 삶이었다.

물론, 현대인의 삶 중 녹녹한 것은 많지 않다.

대도시의 삶 또한 피폐하기 이를 데 없긴 하다.

 

그런 신산하고 고달픈 삶을 작가의 시선을 통해 녹여낸 작품들에서 공감하며 위로를 받기도 하는 게 한 두번이 아니다.

 

"나만 힘든게 아니구나. 저들도 나와 같이 힘들어했구나." 하는 공감대와 타자화를 통해 떨구어 낸 비루함 등은 우리가 없는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한창훈의 산문집 <나는 왜 쓰는가>는 일종의 에필로그 모음집 같은 것이었다.

 

그의 작품들에 대한 배경이나 등장인물들과의 후일담 등이 또 하나의 소설처럼 이 책 내용을 이루고 있다.

천상 작가적인 품성이 아니면 잊어버렸거나 혹은 지나쳐버렸을 것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끄집어내는 그의 기질이 섬세한 여성 못지 않다.

 

치열했던 삶의 현장에서 만났던 이들이 그의 소설 속 주인공 혹은 조연이며, 글쓰기의 스승이자 친구인 셈이라고 한다.

그의 글들은 자극적인 상상력과는 한참 떨어져 있고, 모진 현실 세계에 뿌리내린 사람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날 것 그대로를 길어 올렸지만 해학적이거나 육감적이면서도 남성적이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문체를 유지한다.

 

@russmail/unsplash

 

범생이처럼 큰 세파에 시달리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온 이들의 눈에는 밑바닥에 가까운 인생들의 투박한 삶의 모습들이 생경하게 느껴질 것 같다.

여기에, 인류의 고향인 바다 내음이 젖어들면 마치 원시시대로 돌아간 듯 묘한 정서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곤 한다.

 

한창훈이 들려주는 바다와 섬 이야기에는 마치 전설과도 같은 아련한 스토리가 있다.

 

아리따운 외모이지만 심한 소아마비로 인해 하반신 장애가 있는 소녀의 이야기라던가, 하루 24시간 붙어 지내야만 하는 가난한 어부와 아내가 추운 겨울날 그물에 프로펠러가 걸려 바다 위에서 죽을 고비에 직면해 벌이는 사투 이야기 등은 어찌 보면 그리 신박한 소재꺼리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같은 요리일지라도 천차만별의 맛이 나듯 한창훈 만의 필색은 묘한 감흥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게다가 짧지만 무릎을 탁 치게하거나, 피식 웃음을 웃게하는 그만의 유머와 독특한 감각은 뒤 끝 개운한 얼큰한 국물요리를 먹는 듯 개운하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전혀 겪여보지 못한 제3자의 삶인데도, 그의 책을 읽다보면 정말 실감나게 내가 경험하고 있는 듯 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만큼 생생하게 묘사한다는 얘기다.

이는 타인의 삶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불편한 진실에는 외면해 버리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ivansanford/unsplash

 

세상의 중심에서 권력을 좇고 밝은 면만을 추구하는 세태에 길들여진 이라면 한창훈의 글은 되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 도 있다.

그의 프로필을 대신한 글들이 꽤나 실랄하고 재밌다.

남쪽 바다 먼 섬에서 태어난 그는 20년 넘게 전업작가 짓을 하고 있다. 간혹 실업작가로 착각하곤 한다. 원고 쓰면서 날밤 새운 적 없다. 욕을 잘하고 웃기는 소리도 종종 한다. 그 외는 침묵한다.

사람을 볼 때 51점만 되면 10점 주자,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주어야지 꿀 주면 안된다. 중요한 것은 진심보다 태도이다. 미워할 것은 끝까지 미워하자. 땅은 원래 사람 것이 아니니 죽을 때까지 단 한 평도 소유하지 않는다... 따위를 생활신조로 갖고 있다.

지금도 그 섬에서 살고 있다.

 

작가 한창훈은 한겨레문학상, 요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을 받았다.

2009년 출간한 그의 첫 산문집이었던 <한창훈의 향연>의 개정판이라고 하는데, 사진과 2편의 글을 빼고 일곱편의 새 글을 작가의 말과 함께 새로 담았다고 한다.

책은 총 4부로 구성하여, 1부는 고향사람들과 어린시절을 2부는 친척들을 3부는 함께 했던 동료문인들을 그리고 4부는 작가의 염원을 담았다.


목         차

추천의 말_ 그에게서 돌고래 냄새가 난다 _박상륭

개정판 작가의 말_ 나는 왜 쓰는가

 

1부 사람 떠난 빈 곳으로 바람이 분다

행방을 알 수 없는 한 사람에 대하여

닻 주었던 자리

연등천의 여인들

여수항

동행의 이유

걸었다, 생각을 지우기 위해 ― 부산

가을 운동회가 있던 풍경

크레용

이름이란 그렇게 생길 수도 있다

외진 곳만 골라 다니는 자의 고통

님 떠난 방에는 사진만 남고

사람 떠난 빈 곳으로 바람이 분다

 

2부 살기 좋은 곳은 스스로 부지런해지는 곳

선생님, 강물이 뭐예요?

이사

야무진 섬 처녀 ― 방이 이모

술과 낚시를 사랑했던 엔지니어 ― 방이 이모부

말수 적은 바다 신사 ― 방헌 외숙

제사로 협박하는 여인 ― 외할머니

귀신은 있을까, 없을까

내 이모가 보면 안 되는 페이지

 

3부 궁리하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할 대상

삶을 궁리하는 방법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들

그는 지금도 걷고 있다 ― 유용주 시인

술 그렇게 잡수면 죽어요 ― 故 이문구 선생

터진 언 살이 아물기까지 ― 송기원 시인

끝까지 미워할 수 없는 사람 ― 故 박영근 시인

보매 술에 푹 젖어온 애주가 ― 이흔복 시인

처마 끝 빗물 같은 사람 ― 박남준 시인

그가 그곳에 사는 이유 ― 이정록 시인

오죽하면 시를 ― 안현미 시인

꼼짝없이 술을 마시게 된 이유

 

4부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배두령에게 띄우는 편지

먼 곳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소리

구멍에 대하여

해마다 오월은 돌아와

깊고 푸른 강

웃음에 대하여

포장마차 연탄불은 일회용 고향

물소리를 꿈꾸기에 최적의 장소는 사막

겨울 바다

남도 봄소식

 

초판 작가의 말

출처 : http://www.yes24.com/Product/Goods/17618994?Acode=101


 

웰메이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전체적인 줄거리나 편집도 좋지만, 세세한 부분에서의 톡톡 튀는 재미난 대사나 상황들로 충실하고 완성도 높게 채워져 있다.

한창훈의 글들은 바로 그런 느낌이 든다.

투박한 듯 섬세하고 세련된 그의 관찰력이나 표현력을 자주 부러워하며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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