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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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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출판. 예스 24

 

일등 항해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배의 절대 규칙에 대해 말씀드려야겠군요."

"그게 뭐죠?"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배에 탄 주민들은 모두 귀를 세웠다.

"선장은 언제나 옳다."

"만약 선장이 틀렸을 경우 어떻게 하죠?"

"둘째가 그것이오. 둘째, 선장이 틀렸을 경우."

".............."

"첫 번째로 돌아간다."

선원 출신인 주민이 대꾸했다.

"그런 규칙은 내가 탔던 배에도 있었소. 내가 난파를 당하고 나서 더는 배를 타지 않고 섬에서 살았던 이유는 그런 규칙이 실었던 거요."

"당신같은 선원이 탔었기에 그 배는 난파당했던 겁니다."

                            :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 중에서 - P128

 

 

초등학교 5학년 때 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휴식시간, 3층 교실 앞 복도 창문에 기대어 멍하니 운동장 쪽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느닷없이 1층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교무주임 선생이 시선을 날렸다.

따가운 시선에 내 눈길도 따라 교무주임에게 다다르니, 그는 내게 손짓하며 빨리 내려오라는 제스쳐를 했다.

겁이 덜컥 난 나는 모른 척 교실로 들어가버릴까 하다가 뛰어봐야 벼룩임을 알고 쭈뼛쭈뼛 거리며 교무주임에게로 내려갔다.

 

@se7wyn/unsplash

 

불길한 예감은 말이 없어도 분위기만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아니나다를까... 교무주임은 다짜고짜 꿀밤세례를 내게 선사했다.

어린 내가 받아들이는 느낌은 귀청이 터지는 듯한 굉음소리(?)...정말 끔찍했다.

네댄가 다섯댄가를 연거푸 쥐어박으며...

"너 이**, 왜 이렇게 늦게 내려와! 선생님이 오래는데 빨리 안 오고 중간에 뭐했어?"

너무 어이가 없고 놀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벙어리가 되어 있는데, 언제부터인지 따라 붙어 내려왔던 녀석이 한마디 한다.

"제가 따라왔는데요... 그냥 바로 내려왔습니다. 선생님."

내 입장에서는 알리바이를 입증해준 구세주였을텐데,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그 순간에는 이름도 몰랐던 그 녀석이 얼마나 밉상이던지... 마치 내가 도망이라도 칠까봐 감시했던 놈처럼 느껴졌으니까...

 

경황도 없고 어리벙벙했지만 억울한 표정으로 교무주임을 쳐다보았었다. 대체 왜 나를 내려오라 해서 이런 폭력을 휘두르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면서...

그런데, 교무주임은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말을 뱉어냈다.

"너 같은 놈들이 창문벽에 기대고 그러니까 건물벽에 금이 가는 거잖아~!"

 

그때 받은 마음의 상처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힘없는 초등학생에게 손찌검을 했던 그 교무주임의 인간성도 지랄같지만 그런 행위가 용인되었던 그 사회분위기 또한 정말 지랄같았다.

아마도 교무주임은 누군가에게 혹은 심란한 가정사로든지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상태에서 화풀이할 대상을 찾았던 거였을 테이다.

그 인간에게는 망치같은 주먹으로 연약한 초등학생의 작은 머리를 아무 이유없이 때릴 만큼 엄청난 일이었기를... 그것도 아니라면, 너무 잔인한 처사니까...

 


 

권상우가 주연했던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교내에서 공인된 권력을 이용해 암암리에 폭력을 휘두르던 일당들을 깨부수고 이를 말리려 쫓아오던 교련선생에게 권상우가 울부짖으며 던진 한마디..."대한민국 학교 *까라 그래"...

 

출처 : 네이버 영화

 

처음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침잠해 있던 초등학교 때의 이 사건이 불쑥 의식의 수면위로 치솟아 올랐고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

권상우가 연기했던 주인공의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지금까지도 현실 속에서는 학생 개개인의 인격 쯤이야 장난감 정도로 아는 이런 류의 선생들이 있을까 모르겠다. 지금은 다 은퇴하고 사라졌겠지?

중학교 시절에는 종아리에 피멍이 가실 날이 없을 정도로 허구헌 날 단체기합으로 학생들을 두들겨 패던 선생도 있었다. 하긴 한 번 손맛 들이면 매질은 중독이 될 지도 모른다.

공식적으로 핑계를 잡아 반항도 못하게 상대를 두들겨 패는 일이 어디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인가. 마누라 패는 천상 찌질한 인간들도 절대 손 버릇 못 고친다고 하지 않는가?...

 

쇠도 씹어먹을 나이라는 청소년 시기... 그 왕성한 에너지를 생각해 보면, 수도원처럼 조용한 교실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떠든다고 무조건 매질을 해 댔다.

아무리 맞아도 누군가는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 못하고 또 떠들었고, 또 매질을 했다.

그러니, 하루도 안 맞고 지나가는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때의 학창시절은 잔혹사가 맞는 것 같다.

 


 

짧은 내용의 단편 소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를 읽던 도중, 또 다시 지나간 아픈 기억이 되살아난다.

참 스승을 만나 은혜를 입은 사람들도 많을텐데, 어찌하여 난 함량미달의 교사들만 골라서 만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말로만 "난 너희들을 똑같이 사랑한다."던 담임은 신경써 줘야 할 애들은 무시했고, 혼자서도 잘 하는 모범생들에겐 참으로 각별했다.

 

김기덕 감독의 2017년 영화 <인간,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도 어처구니 없이 행사하는 공권력 혹은 이와 비슷한 내용들이 꽤나 많이 등장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김기덕 감독은 나무위키에 소개된 바에 의하면 세계 3대 영화제인 칸, 베니스, 베를린 본상을 모두 받은 유일한 한국인 감독이지만 2018년 여배우 성폭행 의혹에 대한 PD수첩의 보도로 세간의 입방아에 올라 위상이 크게 추락한 상태라고 되어 있다.

공식 최종학력이 초졸인 그는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고생길을 걸었고 프랑스에서 떠돌이 무명화가로 지내다 1993년 귀국하여 영화진흥공사의 시나리오 공모를 계기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고 한다.

 

거친 삶을 살아온 만큼 그의 영화 또한 거칠다.

대부분 충격적이고 폭력적인 무시무시한 영상과 끝까지 거칠게 끌고 가는 연출때문에 관객들의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기도 한다.

촬영과 편집에서의 디테일은 포기하고 봐야 할 만큼 엉망이지만, 그의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만큼은 확실하게 부각시키는 장점이 있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는 한창훈의 소설치고는 꽤나 상상력을 많이 동원한 작품이다. 현실에 깊게 뿌리를 박고 실생활 속에서 삶의 언어를 길어 올리던 그였는데, 이 책에서는 상당부분 비현실적인 설정들을 가미했다.

물론 디테일한 면에서는 늘 그의 언어가 그래왔듯 생생하게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김기덕의 거친 영화들처럼 한창훈의 이 소설도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두께는 얇지만, 소설을 읽는 시간보다 읽고 난 뒤 사색의 시간이 더 길어질지도 모르는 어찌보면 꽤나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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