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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

사후생.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저/최준식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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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대화문화아카데미. 예스 24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스위스 출신의 정신과 의사이다.

평생을 죽음에 관해 연구하고 사색하였고, 전 세계 호스피스 운동을 활성화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2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세 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났고, 체중미달로 미숙아실에서 생애 첫 시기를 보냈다.

19살때 폴란드 마이다넥 유대인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수용소 벽에 그려진 환생을 상징하는 나비를 보고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다.

 

취리히대학교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한 뒤, 미국인 의사와 결혼해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였고 죽음을 앞 둔 많은 이들과 함께 경험한 것을 세미나를 통해 강연하기도 했다.

 

그녀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명이며, 죽음 직전 육체이탈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 배웠던 바를 쓴 <인생수업>이란 그녀의 마지막 책은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한 삶의 진실과 교훈을 담기도 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둔 이들이 한번만 더 하고 싶어할 것들을 "지금하라"고 <#인생수업>책에 썼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진실되고 충실히 살라는 어찌보면 지극히 단순한 충고는 죽어가는 사람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 여운이 오래 가는 말인것 같다.

 

@gaspanik/unsplash

 

매일 매일 별다름 없이 스쳐지나가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쉽게 권태로움에 빠지곤 한다.

단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머나 먼 미래의 일을 현재로 끌어와 애먼 두려움과 걱정을 부여잡고 있기도 한다.

 

행복을 찾아 떠나는 우리네 일생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건 아마도 사랑하는 것들과의 헤어짐일 것이다. 거기엔 물론 자기자신과의 작별(=죽음)도 포함된다.

마음을 준비할 새도 없이 들이닥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남겨진 사람에게는 얼마나 길게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알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모든 죽음이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건 아니다.

만성질환으로 끝 모를 고통 속에 연명해 왔다면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있는 한계점까지 밀고 간 후 평균수명을 넘어 사망했다면, 어찌보면 이 때의 죽음은 우리가 겪어야 할 생의 마지막 고통을 끝내주는 휴식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가를 확실히 알고 있고, 그 무엇인가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좀 더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지도 모른다.

 

@breakfast_on_jupiter/unsplash

 

엘리자베스 퀴블러는 사후생을 연구하면서, 수 많은 임사체험자들을 만나고 그런 경험들을 집대성해서 책을 내고 강연회를 다녔다.

 

그녀는 사후세계에서 처음 부딪히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빛을 반복해서 얘기한다.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신을 의미할 수도 있는 육체적/정신적 대상의 수준을 넘어서는 그 빛은 육체라는 껍데기를 막 벗어난 영혼(=영생의 존재)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과 모든 것들을 아는 것 같은 충만함을 주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내용이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퀴블러가 얘기하는 #임사체험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육체이탈을 하면서 객관적으로 그 상황을 내려다본다는 점 평소에 제일 좋아했던 사람들 중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만난다는 것이다. 게다가 육체이탈을 하는 순간, 온 몸의 장애나 이상은 완전 복구된다고 한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책 내용을 받아들이기에 힘겨운 부분들이 꽤나 있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주장도 100% 신뢰할 수 없는 만큼 이 부분에 대한 믿음은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경험치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frankiefoto/unsplash

 

'산티 닐라야' #산스크리트어로 모든 번뇌, 아픔, 분노, 슬픔을 경험한 뒤 돌아가야 하는 궁극적인 평화의 집을 의미한다고 한다.

 

퀴블러가 체험한 육체이탈 후 빛과의 합일 경험은 사실 글로 표현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닐지도 모른다.

혹자는 일종의 환각으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른다.

 

타인이 내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아무리 자세히 묘사한 들, 그것을 실체와 얼마나 근접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게다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애시당초 그런 묘사자체도 한계를 갖을 수 밖에 없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 생의 끝도 분명히 정해져 있을 터이다.

 

살아오면서 스스로 세워 온 갖은 원칙과 애매한 믿음들로 지금까지 버텨 왔지만, 육체의 쇠락으로 내리막길을 가고 있음을 실감하는 요즘은 어떤 마무리를 해야할까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저자의 주장대로 그 끝 너머가 그리 두려운 곳이 아니라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을 향해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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