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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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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비. 예스24

 

 

고향이었던 섬을 떠나 떠돌며 인생의 신산한 맛을 듬뿍 맛보고 돌아온 작가는 자신이 살았던 섬의 흉가에 자리를 잡는다. 소위 힘 없고 빽 없는 흙수저의 거친 육지생활은 자신의 뿌리를 되돌아 보게 하였고, 마음의 고향으로 발길을 되돌리게 만든 것이었다.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한 <홍합>에서 선 굵은 문체로 묵직한 감동을 선사해 줬던 '바다와 섬의 작가' 한창훈의 두번째 장편소설인 <섬>은 밝고 경쾌한 소설은 아니다.

"나는 세상 끝을 산다."는 부제에서 풍기는 고독함과 비장함은 파도, 바람, 죽음이 삶 속에 어우러져 있는 섬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적절한 표현인 듯 하다.

 

목차

1. 새

2. 어떤 여인네, 수(琇)

3. 고양이 흰무늬

4. 집

5.무적(霧笛)

6. 어떤 죽음에 대한 보고서

7. 저 먼 과거 속의 소녀

8. 적막에 관하여

9. 달빛이 지면

10. 바람의 여신

11. 단(壇) 쌓는 노인

12. 철새는 날아가고

 

작가의 말

http://www.yes24.com/Product/Goods/331428?scode=032&OzSrank=4


 

1963년 전남 여수 거문도에서 태어난 작가 한창훈은 줄곧 바다와 섬을 텃밭으로 일구고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애잔하고 핍진한 삶을 사실감 넘치는 생생한 이야기로 엮어내 왔다.

스스로를 '변방에서 사는 소외층'으로 부르는 작가는 우리가 잊고 사는 외곽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중심만을 위한 삶이 아닌 온전히 한 덩어리로써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계속 확인시켜 주려는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 사람들이 찾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스며들어가는 작가도 있고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갇히는 글쟁이도 있지만, 한창훈은 사는 곳이 그대로 고립무원의 섬이다.

문명에 벗어난 그의 삶을 고려해보면, 사색의 깊이도 꽤 될 듯 하다.

 

@cjtagupa/unsplash

 

빽빽한 도시의 빌딩건물과 혼잡하기 그지 없는 도로위의 차량들, 그 사이를 빼곡히 채운 크고 작은 욕망의 알갱이들이 부딪히고 깨지는 도시의 삶.

그 살벌한 경쟁의 세상에서 '타고난 능력이 부족하든 노력이 부족하든 아니면 재수가 없었던 간'에 누군가는 다치고 부서진다.

신 자유주의가 익숙해진 현재의 세상에서는 이런 이들을 온전히 끌어안지 못한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꿈에서라도 되고 싶지 않은 외면하려 해도 떨쳐내지 못할 두려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의 문화와 풍습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아직도 세상엔 식인풍습을 지닌 소수민족도 남아 있고, 극 오지에서 현대문명과는 전혀 접촉없이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각양각색의 환경에서 형성된 가치관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는 세상 속에 절대적으로 옳고 확실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마저도 전혀 상반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세상살이가 녹녹치 않음은 분명하다.

 

어느 순간 나는 무한정의 적막과 맞대면을 해버리기로 마음먹었고 고립을 찾아 저 먼 섬으로 들어갔다. 마을을 버리고 고개 너머에서 홀로 살았다. 적막은 내 눈을 되돌려 스스로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했다.

그리고 자신을 빤히 바라본다는 게 변방의 삶과 죽음을 통해 세상을 궁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보니 햇수로 두 해가 지나갔다.

 

 

<홍합>에서보다 한층 더 노련해진 솜씨로 변방의 삶을 해학적이면서도 솔직하게 묘사해 내는 작가의 필력을 통해 순간 순간 작가와 호흡을 같이하며 명상에 빠져 들곤 했다.

작가의 말 처럼 고립을 찾아 들어간 그 섬에서 2 년간 겪었던 일들을 갈무리한 <섬>은 생명의 생성과 소멸의 근원으로써 바다를 비중있게 묘사한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는 무의식속에 자리한 태곳적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두려움으로 바다를 쳐다보는지도 모른다.

 

섬에서 만난 사람들과 자연의 모습을 통해 우리 존재의 본원적 의미를 탐구하고 있는 듯한 이 작품은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삶을 능청스럽게 다루고 있다.

그의 손을 통해 전해져 오는 지방사투리의 구수함도 한창훈만의 독특한 문학세계 단면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michael75/unsplash

 

 

단편 소설 모음집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을 읽을 때, 한창훈이 겪었던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읽어내며 나 또한 나를 스쳐간 인연들을 되돌아 볼 기회를 갖었었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도 많았지만,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인연들도 많았다. 하지만, 내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정도는 안 좋은 것일 수록 깊고 분명했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냉소를 띠며 내 전신을 훓던 사람들이 갑작스레 몇 명 기억난다. 그 전에도 있었지만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 기억으로 첫 번째는 초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서울에 사는 형님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지방에서 올라간 어린 촌놈을 위아래로 말 없이 훓던 20대의 아가씨의 표정은 정말 잊혀지지가 않는다. 어린 나이였지만, 경멸에 가까운 눈초리는 마치 내가 더러운 쥐새끼라도 되는 양 적의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짧은 순간의 트라우마였지만, 각종 갑질사건이 터질 때마다 간간히 되살아나는 기억 중 하나였다. 단순히 외모만으로 상대를 얼마나 하찮게 평가하고 무시하는지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성인이 된 후에도 몇 몇 기억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어처구니 없는 것은 우습게도 친척관계에 있는 사람간의 일이었다.

두 다리 세다리 건너 친척관계인 사람이었는데, 굳이 자신의 아내와 아이에게 소개한답시고 마트 안에서 원치 않는 상봉을 시켰었다.

보험외판원이라는 안 식구는 마트에 오면서도 쫙 차려입고 다닐 정도로 깐깐한(?) 성격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목에 깁스를 댄 채 위 아래로 스캔하는 그녀의 안경너머 불쾌한 눈매만은 정말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사춘기 또래의 딸 또한 그 엄마와 싱크로율 99%를 자랑하며 양쪽을 인사시키려는 아빠의 제스쳐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아내와 딸이 그런 태도를 가지고 상대를 대하는 지 모르고 있었다면 그 또한 한심스러운 사람이고, 알고 있었다면 상대방이 어떤 감정을 갖게 되리라는 것을 모를만큼 무감각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처음 만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저토록 무시와 경멸을 보낼 수 있는 오만함 뒤에는 과연 어떤 생각이 자리잡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문득 드는 생각은 그녀들도 어느 순간 나와 똑같은 경험을 당했고 반복해서 겪으면서, 삭이지 못한 분노를 다른 누군가에게 토해내는 게 아닐까 하는 거였다.

이들이 단 한번의 만남으로 끝이였다면, 수 년을 부딪히며 당했던 경우가 아마도 내 기억 중 하이라이트일듯 하다.

 

@dollargill/unsplash

 

직장 상사였던 그들은 마치 새디스트처럼 언어폭력을 일 삼았는데, 때론 실수를 들먹이며 폭력을 행사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글씨가 성의가 없다 혹은 영어 스펠링이 한 군데 틀렸다" 등 그냥 넘어가면 그만일 것들을 트집잡아 보통 30여분을 상스러운 말로 인격모독을 하곤 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장면 중 하나는, 다음날 결혼식을 치룰 나를 두고 당사자 앞에서 축의금을 얼마 내느냐를 가지고 얘기하던 그들의 모습이었다.

그 돈을 축의금으로 낼 만큼 가치가 있느냐는 거였다.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고 상을 치른 후 다시 출근한지 채 2주가 되지도 않은 시기에 회식이라며 2차로 노래방을 끌고 다니며 웃고 떠들다가 죽상쓰고 분위기 망친다며 지적질을 하던 패륜적인 상사를 둔 분풀이를 자신의 아래 직원들에게 고스란히 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직장은 그런 분위기였다.

 

제대 후 "복무했던 곳을 보면서는 소변도 안 눈다"는 말처럼, 난 그 곳을 빠져나온 뒤 그 더럽고 너저분했던 인간들과의 모든 연줄을 끊고 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살이는 그걸 허락치 않았다.

부득이한 상황에서 다시 마주친 그 인간들의 눈길은 여전히 독하고 말품새 또한 더러웠다.

하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잘 살고 있는 듯 보였다.

 

@fairytailphotography/unsplash

 

그 시기, 그 공간 안에는 정신과 치료가 좀 필요해 보이는 새디스트들이 유독 많이 몰려 있었다.

벌써 20여년 전 일이다.

그 이후 난 좋은 사람들과 좋은 환경에서 괜챦은 기억들로 아픔을 씻어내며 잘 지내왔다.

 

양지보다는 음지를, 쾌활함보다는 음울함을, 미래보다는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한창훈의 글들은 글 쓰는 이들에게는 촌철살인처럼 느껴지는 좋은 문장들이 사방팔방에 널려 있어 기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무거운 건 아닌지 싶기도 하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생각난다.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혼자서 고기잡이를 하던 노인은 그의 배보다 더 큰 청새치를 이틀 밤낮에 걸친 사투끝에 항구로 끌고 오지만, 이미 물고기는 피냄새를 맡은 상어들에 의해 뼈와 대가리만 남은 상태였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어려운 말을 남긴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묵묵히 견디며 받아들이는 강인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다.

한창훈이 그의 작품<섬>속에서 그려 내는 소시민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까닭에 사람냄새 물씬한 그의 소설들이 참 맛있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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