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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아편.모르핀.헤로인.옥시코돈.마약류 진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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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속에서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

고통이 멈추는 것 뿐이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견딜수 없는 것은 없다.

고통 앞에서는 영웅이 따로 없다.

<1984>. 조지 오웰. George Orwell

 

인류문명의 발상지인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는 인류에게 다른 어떤 식물에서보다 더 많은 즐거움과 고통을 준 식물이 발견된다.

이 식물은 '기쁨의 식물(Joy Plant)'이란 의미로 헐 길(Hul gil)이라고 불렸다.

 

Hul Gil- the "Joy Plant". 출처 :  solitaireparke.wordpress

 

이 예쁜 꽃이 피는 파파베르 솜니페름(Papaver somniferum)이라 불리웠던 식물을 우리는 오늘날 아편(양귀비)이라고 부른다.

매우 강력한 약효를 지닌 이 식물은 고대 문명에서는 신이 만든 약품으로 여겼다.

 

양귀비는 양귀비과의 두해 살이 꽃이며, 양귀비의 덜 익은 꼬투리에서 흘러나오는 유액을 말려 채취하는 게 아편이다. 우윳빛 액체가 굳으면 검은색으로 변한다.

 

양귀비는 관상용으로 재배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양귀비 재배가 불법으로 되어 있지만, 불가리아 그리스 인도 일본 파키스탄 터키 러시아 등지에서는 합법적으로 아편을 생산하고 있다.

 

 

 

아편은 생물학적 작용을 하는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① 모르핀 : 강력한 진통제

② 코데인 : 약한 진통제, 기침 억제제

③ 알파-나르코틴 : 근육 이완제

④ 파파베린 : 근육 이완제

⑤ 테베인 : 진통제

 

아편의 부작용을 정확히 몰랐던 시기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 많은 의사들이불면증, 두통, 현기증, 간질병, 뇌일혈, 약시, 기관지염, 우울증, 나병, 요석 등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했다.

로마인들도 아편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아편무역은 아랍 상인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7세기경중국에 아편을 들여온 이들도 그들이었다. 결국 중국인들은 아편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1660년대부터 영국회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막대한 양의 아편을 들여왔고, 1839년 흠차대신이었던 임칙서가 영국아편을 압수하면서 영국과 중국사이에 아편전쟁이 일어난다.

 

천비해전에서 영국해군에 격파되는 청 군함. E.던컨. 1840년.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2번의 전쟁에서 모두 패한 중국은 영국에 많은 보상을 해야 했는데, 더 많은 항구 개방과 홍콩을 영국에 조차해야 했다.홍콩은 지난 1997년에 중국에 반환되었다.

1900년에 중국에는 1,300만 이상의 아편 중독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유럽인들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아편이 금지품이었다.

1850년과 1870년 사이에 약 7만명 가량의 중국인들이 금광과 철도 공사장에서 일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아편도 같이 딸려 왔다.

 

처음에 중국이민자들 사이에 제한적으로 유행하던 아편굴은 이후 배우, 도박꾼, 매춘부, 범죄자들이 드나들면서 로스엔젤레스, 뉴욕, 시카고, 마이애미로 퍼지기 시작했다.

1909년 미국 의회는 아편 배제 법률을 통과시켰지만, 이미 많은 미국인들이 아편에 중독된 후였다.

 


 

아편의 중독성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유발했지만, 진통효과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많은 과학자들은 아편의 진통효과는 유지하면서 중독성을 없애는 방법을 찾아 연구에 매진했다.

 

 

 

아편중독. 출처 ; 네이버 이미지

 

1803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제르튀르너는 아편에서 가장 강한 진통성분인 모르피움을 추출해내는 데 성공하는데, 이는 나중에 모르핀으로 이름이 바뀐다.

모르핀은 아편보다 여섯배나 더 강력한 진통효과가 있는데다 효과도 바로 나타났지만 우울증을 유발하고 의존성이 심각했다. 제르튀르너도 연구가 끝났을 때 이미 모르핀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지금처럼 약물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1820년대, 독일 제약회사 메르크Merck는 모르핀을 대량생산하였다. 게다가, 피하주사기의 발명과 더불어 모르핀은 가장 많은 중독자를 만들어낸 약물이 되었다.

 

진통효과를 그대로 지니면서 중독이나 의존성은 없는 약물을 발명하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1874년 런던의 약사가 모르핀과 식초를 혼합하여 디아세틸 모르핀을 만들었다. 아세틸화된 모르핀은 훨씬 적은 양으로 동일한 진통효과를 나타냈고, 사용량 감소로 인한 중독감소를 기대했었다.

 

소듐 살리실산을 아세틸화하여 아세틸살리실산(아스피린)을 만들어 위염을 유발하는 문제를 해결했던 새로운 약품인 바이엘 아스피린을 내 놓았던 드레서와 호프만(Bayer 제약회사)은 디아세틸 모르핀을 만들어냈고, 이 약품은 모르핀보다 진통효과는 다섯배나 되지만 습관성이 없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발표는 약 4주 동안 불과 몇명에게서 시험한 데이터에 기반한 것이었다. 요즘 같으면 있을수도 있어서도 안 될일이었다.

 

그들의 눈에 거의 기적처럼 보였던 디아세틸 모르핀의 이름을 지으면서, 드레서는 영웅(Hero)이라는 뜻의 헤로이쉬라 불리우기를 희망했다. 드디어, 1898년 바이엘 제약회사는 이 약품을 헤로인이라는 이름의 출시한다.

 

@matthew_t_rader/unsplash

 

제품 발매 당시에는아스피린보다도 더 안전하다고 광고된 까닭에 의사의 처방없이도 누구나 구입할 수 있었다.

 

1906년 미국 의학협회 잡지는 헤로인을 '기관지염, 폐렴, 폐결핵, 천식, 백일해, 후두염 그리고 건초열의 치료제'로 추천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헤로인의 부작용사례는 넘쳐나게 많았다.

제약협회와 화학협회는 헤로인의 의존 습관 형성 및 각종 부작용에 대해 경고했지만, 바이엘은 1913년까지도 헤로인이 안전하다는 광고를 계속했다.

 

1924년 의회가 헤로인법률을 통과시켜 헤로인의 제조와 판매를 중지시키고 불법화하였다. 이 시기에 헤로인의 주 공급자들은 갱단이었고, 이후 이탈리아의 마피아들이 이 역할을 담당했다.

 

1977년 사망한 전설의 락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도 헤로인 남용으로 인한 사망이었고, 그 외 많은 유명인사들이 헤로인 및 약물 남용으로 사망했다.

1995년까지 60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헤로인에 중독되었다.

 

미국 마약 단속국은 헤로인을 추방하기 위해 매년 130억 달러를 쓰고 있다고 한다.

 

@goashape/unsplash

 

과학자들의 연이은 실패는 아편의 또 다른 성분인테바인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테바인은 양귀비를 재배했던 고대 이집트의 도시이름에서 유래한다.

1916년 독일의 화학자들이 테바인의 최초합성약물인 옥시코돈을 발명해낸다.

1950년대 미국에 최초로 소개된 옥시코돈은 아스피린이나 이부프로펜, 아세트아미노펜 등과 혼합되어 판매되었다. 그 중 가장 많이 남용된 것은 순수한 옥시코돈으로 만든옥시콘틴이었다.

 

관절염 치료제로 판매한 옥시콘틴은 생산자에게 어마어마한 부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옥시코돈 또한 심각한 중독 증상이 속출했고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중독성 약물임이 드러난다.

 

결국, 아직까지는 마약성 진통제 중 중독성이 없는 약품은 개발되지 못한 상태이다.

 

최근, 마약성 진통제는 말기암이나 회복이 불가능한 말기상태의 환자들에게서 진통완화 목적으로 투여가 용인된 상태이다. 고통스럽게 죽는 대신 고통에서 해방되어 존엄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호스피스 운동이 전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benwhitephotography/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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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마약성 진통제(혹은 마약)로 인한 사망을 포함한 각종 중독과 금단증상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모든 약물이 양날의 검이긴 하지만, 마약성 진통제만큼 인류에게 즐거움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준 약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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