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산타가 다녀간 밤, 범인은 이 안에 있다.

2025. 12. 25. 17:39끄적끄적

 

 

어릴 적 나는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산타를 믿었다. 순진해서가 아니라, 알리바이가 너무 완벽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메소드 연기파였다. 크리스마스이브엔 늘 "산타는 자는지 꼭 확인해. 애들이 깨어있으면 그냥 가버린데."며 엄포를 놓았고, 나는 완벽한 수면 연기를 펼치며 이불 속에서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부스럭대는 비닐 소리, 조심스런 발소리.

"쉿, 깰라. 조심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저 속삭임이야말로 크리스마스와 연결되는 출처를 알수 없는 아련한 목소리였다.

굴뚝도 없는 아파트 12층에, 그것도 최신 디지털 도어록을 뚫고 들어오는 존재라니. 아빠는 "요즘 산타는 마스터키를 쓴단다"라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덧붙였지만, 내가 원했던 선물이 눈앞에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랴. 역시 산타할아버지는 착한애들 선물은 꼭 챙겨주는구나...

내 크리스마스 세계관이 흔들린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이때까지도 산타가 선물을 준다고 믿는 애들은 나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었을때이긴 했다. 누구나 자기가 믿고 싶은데로 믿는 건 나이를 떠나 변치 않는 진실이었다...

그날 아침, 내 머리맡엔 선물이 두 개였다. 하나는 내가 노래를 불렀던 최신 게임기, 다른 하나는… 난생처음 보는 브랜드의 투박한 손목시계였다.

"어? 이건 뭐예요?"

부모님의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엄마가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는 정말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우린… 게임기만 준비했는데?"

어라. 평소 산타 대변인 노릇을 하던 분들이 산타를 부정한다?

"그럼 이건 진짜 산타가 준 거예요?"

내 순진한 질문에 엄마는 3초간 정지하더니,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대답했다. "어… 그, 그렇겠지? 하하. 산타가 너한테 시계가 필요해 보였나 보다."

웃음소리가 너무 건조해서 바스락거릴 지경이었다.

 

그날 밤, 나는 방문 틈으로 거실에서 대화하는 부모님의 말을 듣게 되었다.

"여보, 진짜 당신 아니야?"

"내가 미쳤어? 애한테 그런 아재 같은 시계를 사주게? 당신이 산 거 아니었어?"

"난 맹세코 아니야. 그럼 저게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긴 침묵 끝에 아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진짜 산타가 있나?"

 

초등학교 2학년에게 이 상황을 이해하긴 너무 힘들었다. 어른들도 모르는 세계가 있고, 우리 집엔 부모님 말고 제3의 누군가가 드나들고 있었다. 그 후로 크리스마스마다 선물은 꼭 하나씩 더 늘어났다. 하나는 내가 원했던 것 (부모님 담당). 다른 하나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하지만 묘하게 실용적인 물건들 (제3의 누군가 담당). 가죽 지갑, 고급 샤프 세트, 목도리, 튼튼한 우산… 누가 봐도 초등학생 취향은 아니었다.

마치 미래에서 온 내가 "야, 너 이거 곧 필요해진다"하며 던져주고 간 느낌이랄까.

진즉부터 '부모님이 산타'라는 진실을 알게 됐지만, 저 추가 선물의 미스터리만큼은 풀리지 않았다. 부모님도 어느 순간부턴 포기한 듯했다. 그들은 매년 정체불명의 선물을 보며 해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올해는 지갑이 필요했구나. 산타가 참… 센스 있네."

도대체 우리 집에 드나드는 저 '센스 있는' 침입자는 누구란 말인가. 정말 산타가 있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미스터리가 풀린 건 내가 군대 첫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짐을 정리하다가 구석에 박혀있던 먼지 쌓인 상자를 발견했다. 초등학교 때 쓰던 보물 상자였다. 그 안엔 다 용돈 기입장도 있었고, 부모님이 만들어 주셨던 낡은 사진첩도 들어있었다. 무심코 사진첩을 넘기던 내 손이 멈췄다. 3학년 크리스마스이브 밤, 거실에 설치해둔 홈 CCTV 화면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사진 속엔 범인이 아주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였다.

잠옷 바람으로 거실 한가운데 서서, 한 손엔 부모님이 준비한 게임기를, 다른 한 손엔 그 문제의 '산타에게 줄 선물'을 들고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아이. 부모님은 비몽사몽 중인 나를 보고 얼마나 놀라셨을까..."쉿, 깰라...조심해." 어렴풋이 기억나는 이 말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순간, 봉인됐던 기억의 파편들이 뇌를 강타했다.

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었다. 산타에게 받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 나도 뭔가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달간 용돈을 모아 산타에게 줄 선물을 샀다. 그게 그 투박한 시계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걸 산타에게 어떻게 전달하지? 깨어있으면 산타가 그냥 가버린다고 했는데...산타가 가져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저런 궁리끝에 잠든 나는, 결국 몽유병 환자처럼 일어나 기행을 저지렀던 모양이다. 산타에게 줄 선물을 거실 크리스마스 트리 밑 내 선물 옆에 나란히 놓아두고는, 세상모르고 다시 잠들어버린 거다. 다음 날 아침, 내 머릿속은 깨끗하게 포맷된 채로. 어떻게 그렇게 까마득히 잊어버릴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 이후의 '진짜 산타'의 선물들도 전부 설명이 됐다. 지갑, 샤프, 목도리… 모두 내가 용돈을 모아 샀지만, 어떻게 줘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결국 자급자족해버린 셈이 된 아이템들이었다.

나는 사진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엄마, 아빠. 이거 기억나?"

 

사진을 본 부모님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이내 빵 터졌다.

"아이고, 드디어 알았니? 우린 네가 언제쯤 깨닫나 했다."

"그럼… 다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자다가 거실에 나왔더니 네가 눈을 반쯤 뜨고는 선물박스를 들고 서성거리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깨우면 큰일 날거 같아서 그냥 뒀지."

엄마가 말을 이었다.

"네가 네 돈으로 산 거니까, 그냥 네 선물인 척 옆에 놔뒀지. 매년 아침마다 네가 '이건 뭐지?' 하는 표정 지을 때 우리가 얼마나 웃음 참느라 힘들었는 줄 알아?"

그랬다. 우리 집 크리스마스엔 세 명의 산타가 있었다. 자식을 위해 연기하는 부모님 산타 둘, 그리고 스트레스성 몽유병으로 자기 자신에게 선물을 투척하던 정신 나간 산타 하나.

나는 이제 조카의 선물을 포장하며 생각한다. 산타는 있다. 다만, 우리가 알던 그 근사한 할아버지가 아닐 뿐이다. 산타의 정체는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거나, 혹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흑역사를 생성해내는 우리들 자신이다. 물론, 나는 조카가 잠들면 방문을 꼭 잠글 생각이다. 혹시라도 몽유병 유전자가 발동해서 흑역사를 되풀이하는 일은 막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