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상담실에서 가장 먼저 치료받은 건 의자였다

2026. 1. 9. 18:09끄적끄적

 

상담실 문이 닫히자마자 준호는 의자에 앉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의자를 ‘감정’했다.

“음, 이 의자. 요추 지지력이 엉망이네요. 제가 예전에 인체공학 가구 쪽 프로젝트를 좀 봐줘서 아는데, 이런 건 30분만 앉아 있어도 허리 디스크 옵니다.”

상담사는 메모를 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은 이미 ‘오늘 장난 아니겠는데?’라고 말하고 있었다. 프로의 미소였다.

“불편하시면 쿠션을—”

“아뇨, 됐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게 제 장점이니까요. 이런 게 다 상담의 연장이죠, 안 그렇습니까?”

상담사는 조용히 펜을 다시 잡았다. 의자는 말이 없었지만, 왠지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이곳을 찾으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일단 확실히 해둘 게 있는데, 전 아무 문제 없습니다. 단지 제 주변 사람들이 제 ‘높은 해상도’를 감당하지 못할 뿐이죠.”

상담사가 고개를 까딱였다.

“높은 해상도요?”

“네. 제가 경험도 많고 통찰력이 좀 남다르거든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정답’을 알려주는데, 요즘 애들은 그걸 간섭이라고 하더라고요. 효율성을 모르는 거죠.”

“본인의 경험이 정답이라고 확신하시는군요.”

“확신이 아니라 데이터죠.”

 

준호는 상담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터셉트를 시도했다.

“예를 들어볼까요?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전 3초 만에 해결책을 줍니다. 공감이니 위로니 하는 건 시간 낭비잖아요? 감정은 감정이고 문제는 문제니까.”

“그럴 때 친구분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대부분 조용해지더군요. 감탄한 거죠. 침묵은 곧 동의 아닙니까? 제가 심리학 서적을 좀 탐독해서 아는데, 원래 진실 앞에서는 다들 숙연해지는 법입니다.”

상담사의 펜이 잠깐 멈췄다. 그녀의 메모장에는 [심리학 책(아마도 베스트셀러 한 권) 읽음]이라는 문구가 적혔다.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시는 편인가요?”

“물론이죠. 0.1초의 오차도 없이 듣습니다.”

준호가 당당하게 답했다.

 

“다만, 상대방이 말이 꼬이거나 중복되는 이야기를 하면 제가 ‘요약 정리’를 해주는 겁니다. 상대가 하려는 말을 제가 먼저 선수 쳐서 말해주면 얼마나 고마워하겠어요? 시간 아껴주지, 요점 짚어주지.”

“상대방은 그걸 ‘말이 끊겼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그건 그 사람이 말을 너무 느리게 해서 생기는 착시 현상입니다. 제 속도가 정상인 거죠.”

 

상담실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상담사는 물을 한 모금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아주 차분하게, 하지만 날카로운 메스처럼 말을 꺼냈다.

“준호 씨. 지금 제가 말을 시작하려는 찰나마다 끼어들고 계신 거, 알고 계신가요?”

“아, 그건 제가 설명을 보충하려고—”

“방금도요.”

준호의 입이 벙긋하다가 멈췄다. 정확히 2.5초 동안 상담실엔 시계 초침 소리만 들렸다.

“그건 의도적인 게 아니라 효율을 위한—”

“알겠습니다.”

상담사가 이번엔 준호의 말을 부드럽게 가로챘다.

 

“이제 제가 제 ‘데이터’를 하나 공유해 드려도 될까요? 저도 이 일을 꽤 오래 했거든요.”

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전문가의 인정을 받을 시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자기 경험을 ‘진리’라고 믿는 분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본인 이야기를 하느라 너무 바빠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타인의 진심을 ‘들려본’ 적이 없다는 거죠.”

준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좀 일반화의 오류 아닌가요? 상담사님답지 않게.”

“맞아요. 그래서 준호 씨가 직접 증명해 보시라는 겁니다.”

 

상담사는 미소 지으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다음 상담까지 숙제입니다. 누구와 대화하든, 상대방이 말을 완전히 끝내고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3초간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입술을 깨물어서라도요.”

“그거… 저한테 너무 손해 아닌가요? 답답해서 병날 것 같은데.”

“그 답답함이 바로, 지금까지 준호 씨 주변 사람들이 느껴온 ‘공기’입니다. 그걸 견디는 게 진짜 통찰이죠.”

 

상담실 문을 나서며 준호는 넥타이를 고쳐 맸다.

“흠, 저 상담사… 말은 좀 짧게 하는데 통찰력이 좀 부족하네. 그래도 내가 수준이 높으니까 이해해 줘야지.”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평소 같으면 바로 꺼냈을 스마트폰을 꺼내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입술 주변이 간지러웠다.

상담실 안, 주인 잃은 의자는 비로소 평화를 되찾은 듯 고요하게 서 있었다.

치료가 시급했던 건 준호였을까, 아니면 그의 자의식에 짓눌렸던 의자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