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2. 15:20ㆍ끄적끄적

전쟁은 사람을 빠르게 성장시킨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성장이라는 것이 반드시 올바른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성장은 기형적이고, 어떤 성장은 잔인하다. 특히 그 전쟁이 어른들의 세계가 아닌, 아이들의 세계에서 벌어질 때는 더욱 그렇다.
나는 군대에서 서열을 배운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 후줄근한 교복을 입고 더러운 운동화를 신은 채 머뭇거리던 교실에서 모든 서열의 법칙을 익혔다.
아이들은 누구보다 빨리 서열을 배운다. 그것은 학습이 아니라 생존 본능에 가까운 후각이다. 누가 빠르고, 누가 느린지. 누가 말이 많고, 누가 고개를 숙이는지. 누가 집에 돌아가면 따뜻한 밥이 있고, 누가 문 닫힌 음식점 앞을 서성이는지. 가난과 혼란이 뒤범벅인 세상일수록, 서열은 마치 문신처럼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먼저 표식이 되는 것은 가난과 흔들림이다. 가난은 낡은 교복 소매와 구멍 난 양말 사이로 숨길 수 없이 배어 나오고, 흔들림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도 붉어지는 얼굴과 떨리는 동공으로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집단은 그런 아이를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그것은 계획된 악의라기보다는, 마치 상처 난 짐승의 피 냄새를 맡은 사냥개의 본능과도 같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감지한다. '저항하지 않을 것 같은 인간'을. 왕따는 우발적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본능이 찾아내고, 침묵이 키워낸 결과물이다.
처음에는 농담이라는 가면을 쓰고 시작된다. 웃자고 던진 말 한마디. 하지만 그 말 뒤에 아무도 제동을 걸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하나의 놀이가 된다. 놀이가 반복되면 규칙이 생기고, 규칙이 생기면 역할이 고정된다. 누군가는 웃기는 역할을, 누군가는 때리는 역할을, 그리고 누군가는 맞는 역할을 맡는다. 맞는 역할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다만 거절하지 못했을 뿐이다.
돈을 빼앗는 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잠깐 빌리자"는 비열한 말로 시작된다. 되돌려주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그다음부터는 요구가 된다. 요구가 반복되면 권리가 된다. 빵셔틀 또한 그런 방식으로 탄생한다. 그 아이의 노동력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의 두려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빵을 사 오게 만드는 힘은 배고픔이 아니라, 거절했을 때 벌어질 일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공포의 연대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들은 스스로를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로 모든 책임을 회피한다.
집단은 언제나 개인에게 가장 강력한 면죄부를 준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했다는 말은, 죄책감을 n분의 1로 희석하고 책임을 증발시키는 가장 쉬운 문장이다.
그리고 집단은 반드시 명분을 필요로 한다. 약자를 괴롭히는 데는 정당해 보이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명분은 종종 그 아이의 가장 아픈 곳, 즉 집에서 온다.
"쟤네 엄마 바람났대." "아빠 없대." "집에 돈 없대."
어머니의 외도는 그 아이의 죄가 아니다. 그러나 집단은 그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상처가 될 만한 이야기 그 자체다. 아이의 얼굴이 굳고, 말문이 막히고, 도망치지 못하게 만드는 이야기.
왜 하필 어머니일까. 왜 가장 가까운 사람의 가장 은밀한 치부를 들춰내는 걸까. 그건 가족이 인간의 마지막 방어선이기 때문이다. 집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 아이는 완전히 혼자가 된다. 집단은 그 고립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래야 마음 놓고 물어뜯을 수 있으니까.
놀림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건 상대를 설명 불가능한 존재로, 우리와는 다른 종(種)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아무리 억울해도,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이미 퍼진 이야기는 흔들리지 않는 사실처럼 작동한다.
"쟤는 원래 그런 애야."
이 한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폭력은 더 이상 설명될 필요가 없어진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왜 아무도 말리지 않았을까. 왜 어른들은 몰랐을까. 하지만 집단 폭력의 진짜 질문은 그것이 아니다. 왜 모두가 자기 차례가 아닐 때 침묵했는가이다.
왕따는 특별한 악인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밟지 않으면 언젠가 내가 밟힐지도 모른다는 원초적인 공포가 만들어낸 결과다. 그래서 왕따 당하지 않은 다수는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약자를 희생양 삼아 자신을 안전하게 만든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고 달려드는 맹수에게 다리를 다친 먹잇감이 무리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되듯, 그들은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타인의 고통을 방관한다.
그 아이는 결국 조용해진다. 말수가 줄고, 시선이 바닥으로 향하고, 존재를 최소한으로 줄인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지운다.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쉽게 말한다.
"성격이 내성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격이 아니라 전략이다. 부서지지 않기 위해 선택한 가장 비굴하고 처절한 형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 아이는 여전히 타인의 악한 기척을 먼저 감지한다. 자기 안에서. 그래서 먼저 움츠러들고, 먼저 물러난다.
폭력은 끝나지 않는다. 형태만 바뀔 뿐이다. 교실에서 사무실로, 아이들 사이에서 어른들의 사회로.
다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는다. 무리들은 언제나 약점을 가진 사람을 찾고, 그 약점을 이유로 삼아 자신들의 불안을 덮는다.
그 아이의 상처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비겁한 안정을 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이 그날의 공모자였다고는 기억하지 않는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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