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4. 11:53ㆍ끄적끄적

새해 첫 출근길의 공기는 유독 날이 서 있었다. 로비에 걸린 ‘2026년, 위대한 도약’이라는 푸른색 현수막이 바람에 요란하게 펄럭였지만, 시무식장으로 향하는 직원들의 어깨는 외투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워 보였다.
식장 입구에서 영혼 없이 커피를 젓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활기찬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후배 민석이었다. 그는 마치 이 빌딩 숲의 한파를 혼자만 비껴간 사람처럼 매끈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역시 형님이 제일 먼저 와 계시네요. 존경합니다.”
민석은 언제나 그랬다.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윤기 나는 단어들,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최적의 각도로 숙여지는 고개. 그는 사내에서 ‘사회성 좋은 후배’로 통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그의 웃음은 잘 닦인 쇼윈도의 유리처럼 투명하기보다 차가웠다. 그는 진심을 전하는 법보다, 진심처럼 ‘보이는’ 기술을 먼저 터득한 친구였다.
“어, 그래. 민석이 너도 복 많이 받고.”
내 건조한 대답에 아랑곳않고 민석은 한 걸음 더 밀착해왔다. 그리고는 낮고 은밀하지만, 묘한 힘이 실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형님, 정말 제가 올해 잘해드릴게요. 저만 믿으십시오.”
그의 말은 공중으로 흩어지는 대신 내 귓가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보통의 후배라면 든든함을 느꼈을 법한 멘트였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눈동자 뒤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계산기를 보았다. 저 말은 충성의 맹세라기보다, 올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나라는 발판을 어떻게 이용할지에 대한 선전포고처럼 들렸다. 그는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했다. 누구의 줄을 잡아야 동아줄이 될지 본능적으로 아는, 서글프도록 영리한 사냥개 같았다.

시무식이 시작되고 단상 위에 선 경영진들은 ‘혁신’과 ‘고통 분담’을 외쳤다. ‘관리자’라는 애매한 직함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 언저리에 서 있었지만, 정작 내 발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딛고 선 일반 직원들 쪽에 더 가까웠다.
회사는 나에게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워주었지만, 정작 그것을 통제할 실질적인 권한은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게 설계해 두었다. 위에서는 압박하고 아래에서는 치고 올라오는, 그 피로한 완충지대가 바로 내 자리였다.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석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물개 박수를 치며 임원진의 눈길을 사로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저 번지르르한 생존 본능이 역겨우면서도, 한편으론 부러웠다.
시무식이 끝나고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피해 잠시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앉아서 일을보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간 그는 문을 잠그자마자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민석이었다.
방금 전까지 시무식장을 휘어잡던 그 자신감 넘치고 유려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잔뜩 움츠러들고 떨리는, 물기 어린 목소리가 타일 벽을 타고 울렸다.
“...여보, 나야. 응, 지금 시무식 끝났어. 아니... 괜찮아, 다 잘될 거야.”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번 구조조정 명단... 돌고 있다는 거 진짜 같아. 나 이번에 밀리면 진짜 끝장이야. 대출 이자도 겨우 막고 있는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지. 아까 부장님한테도... 그래, 납작 엎드렸어. 자존심이 뭐가 중요해. 당신이랑 애들 생각하면 내가 무슨 짓을 못 해...”
나는 숨을 죽였다. "제가 올해 잘해드릴게요"라며 번들거리던 그의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개의 눈빛이 아니었다. 벼랑 끝에 몰린 초식동물이 살기 위해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이었다. 나를 이용하려던 게 아니라,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었던 절박함이었던 것이다.
민석이 화장실을 나간 뒤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위로, 칸막이 안에 숨어 떨고 있었을 민석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로비는 여전히 새해의 희망찬 BGM으로 시끄러웠고, 사람들의 덕담을 주고받는 어수선함이 떠돌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올해 목표 달성을 독려하는 본부장의 단체 문자였다. 나는 휴대폰을 깊숙이 찔러 넣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민석이 썼던 그 완벽한 가면이, 어쩌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괜찮은 척하는 선배’의 가면보다 훨씬 더 무겁고 버거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가면 무도회에서 처절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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