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묻지 않은 역사] 3. 보이지 않는 전선, 무너진 정의의 파편
2025. 12. 20. 14:00ㆍ끄적끄적

전쟁은 마침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거대한 말줄임표였을 뿐이다. 총성이 멎은 자리에 들어선 것은 정갈한 평화가 아니라, 악취가 진동하는 욕망의 공백이었다. 그 공백을 가장 먼저 채운 것은 국가 재건의 사명감이 아니라, 비릿한 돈 냄새와 교활한 연줄,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염치없는 요령이었다. 거리는 군복을 채 벗지 못한 이들이 폐허 위를 유령처럼 배회했고, 임시로 세워진 건물들은 불안하게 어깨를 맞댄 채 내일이 없는 오늘을 버티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혼돈의 한복판에서 장교의 계급장을 떼어내고 원주시청의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 빳빳하던 군복 대신 어깨가 축 처진 낡은 양복을 입었고, 총 대신 잉크 냄새 나는 서류철을 들었다. 누군가는 전쟁터에서 돌아와 따낸 그 자리를 '안정'이라 불렀지만, 아버지에게 시청은 또 다른 형태의 전투 구역이었다. 이곳에선 총알 대신 비릿한 청탁이 오갔고, 명령 대신 은밀한 뒷거래가 강물처럼 흘러다녔다.
아버지는 지독하게 우직했다. 세상사를 좀 안다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모습은 사회부적응자였을터이다. 군대라는 명확한 규율의 세계에서 온 그에게, 시청의 생리는 이해할 수 없는 무질서의 늪이었다. 규정은 종이 위에서만 존재했고, 실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누구의 고향 선배인가', '어느 국회의원의 줄인가' 하는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었다. 시쳇말로 줄도 빽도 없었던 아버지는 그것을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그 흐름에 발을 담그기를 아버지는 결사적으로 거부했다.
뒷돈을 챙기며 비리를 눈감아주는 동료들의 번들거리는 얼굴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패였다. 결국 사건은 터졌다. 공사 인허가를 빌미로 검은 돈을 챙긴 동료의 멱살을 잡은 것이었다. 사무실 바닥으로 하얀 서류들이 눈발처럼 흩날렸고, 고성이 오갔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시청 공무원 조직 내에서 '이물질'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다루기 힘든 사람, 혹은 혼자만 깨끗한 척하는 병신.
아버지의 분노는 단순한 정의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의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오래된 응어리를 끌어올린 것이었다. 서류를 조작해 어머니의 땅을 가로채려 했던 친척들, 무심한 표정으로 도장을 찍었을 게 뻔한 면사무소 직원들의 얼굴. 그때 느꼈던 무력감이 시청의 복도에서 환각처럼 되살아났다. 아버지에게 부패는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오랜 적이었다. 다만 아버지는, 이제 장교 출신 공무원이라는 방패가 있으니 그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때까지 한번도 아버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모두가 한쪽 눈을 감고 세상을 볼 때, 두 눈을 똑바로 뜬 사람은 오히려 기형 취급을 받았다.
"너 혼자 잘난 척한다고 세상이 바뀌냐? 적당히 묻어가는 게 처세야."
독기 어린 조롱이 공기 중에 부유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이를 악물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제자리에서 고립되는 것뿐이었다. 힘도, 빽도 없는 말단 공무원의 위치는 그를 점점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느낌이었다. 언제든 찍혀 나갈수 있다는 공포는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에겐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능선을 넘으며 느꼈던 '경계인'의 불안과 맞물려 아버지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술을 마셨다. 도망치듯, 마취하듯, 술을 마시면 잊을수 있다는 듯 매일같이 들이켰다. 요령도 없이 안주 하나 없는 소주나 막걸리를 목구멍에 쏟아부었다. 이기지도 못할 술기운에 취하면 아버지는 짐승처럼 토해냈고, 그 비참한 뒤처리 끝에 쓰러져 잠들었다. 그것은 향락이 아니라, 기억의 회로를 끊어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아침마다 쌀을 갈았다. 귀한 쌀을 곱게 갈아 끓여낸 뿌연 쌀물. 해장국조차 제대로 올릴 수 없던 가난한 살림에서 어머니가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침묵의 위로였다. 어머니는 술을 끊으라는 잔소리 대신, 아무 말 없이 그 그릇을 아버지 앞에 밀어 놓았다. 그 고요함이 때로는 아버지의 울분보다 더 무거웠다.
요령 좋은 동료들은 비리를 자양분 삼아 집을 사고 땅을 넓혔다.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냈고, 세상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아버지는 그들을 경멸했다. 취기가 오르면 "저런 놈들이 나라를 망친다"며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 욕설의 밑바닥에는 지독한 자기혐오와 부러움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부(富)를 쌓는 법을 몰랐던 게 아니다. 다만 그것을 선택하는 순간, 평생 증오해 온 세상과 자신이 한 몸이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을 뿐이다.
타협하지 않으려는 자존심은 그의 삶에 커다란 족쇄가 되었다. 궁핍은 그림자처럼 일상이 되었고, 미래는 안개 낀 강원도의 산길처럼 막막했다. 세상은 틀렸고 자신은 옳았지만, 그 옳음을 증명할 힘이 아버지에겐 없었다. 남은 것은 지독한 고립감과, 거칠어진 숨소리뿐이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버지는 트라우마와의 전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
적은 이제 눈에 보이는 총구가 아니라, 서류 뒤에 숨은 웃음 속에, 술잔을 건네는 동료의 손끝에 묻어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끝내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과 화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지독한 불화는, 차갑고 무거운 유산이 되어 가족이라는 혈관을 따라 다음 세대로 퍼져나갔다. 감당하지 못한 분노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애꿎은 가족들에게 주사(酒邪)로 흩어졌고, 자신이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삶을 이끌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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