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31. 11:40ㆍ리뷰

오늘은 조금 서늘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을 품은 영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바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신작 <부고니아(Bugonia)>입니다. 이 영화, 아시다시피 한국 영화사의 전설적인 저주받은 걸작,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작품이죠.
1. 엠마 스톤의 삭발, 그리고 '안드로메다 황제'의 강림
이 영화의 가장 파격적인 지점은 역시 배우 엠마 스톤입니다. <가여운 것들>로 정점을 찍더니, 이번엔 아예 머리칼을 화끈하게 밀어버리고 등장하죠. 원작에서 백윤식 배우가 연기했던 '강 사장' 역할의 변주인데, 엠마 스톤은 그 특유의 커다란 눈망울로 인간을 향한 연민과 혐오가 동시에 담긴 묘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사실 <지구를 지켜라>포스터만 보면 가벼운 SF 코미디 같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인류의 본성을 해부하는 날카로운 메스 같은 영화입니다. <부고니아> 포스터는 원작과는 느낌이 완전 다르긴 하죠.

2. "툭" 하고 터져버린 지구, 그 허무한 종말의 미학
영화 후반부, 안드로메다 황제인 엠마 스톤이 지구를 감싸는 보호막을 날카로운 바늘로 툭 터뜨리는 시퀀스는 이 영화의 백미이자 가장 잔인한 장면입니다.
- 어벤져스의 타노스 vs 부고니아의 엠마 스톤 : 타노스가 인구 절반을 날린 것이 '우주적 균형'을 위한 비장한 결단이었다면, <부고니아>의 종말은 마치 아이가 다 놀고 난 풍선을 터뜨리는 것처럼 무심하고 가볍습니다.
- 길게 늘어진 사망의 풍경 : 지구 구석구석, 평범하게 일상을 살던 인간들이 널브러져 죽어있는 모습이 긴 호흡으로 비춰질 때, 관객들은 그야말로 얼어붙었을 겁니다. 비록 영화속 한 장면이지만 "우리가 쌓아온 문명이 고작 바늘 끝 하나에 무너질 만큼 나약한 것이었나?" 하는 허무주의가 가슴을 때릴지도 모르죠.

3. 영화 비하인드: 알면 더 소름 돋는 이야기들
구글링을 해도 잘 안 나오는, 혹은 놓치기 쉬운 비하인드 스토리를 몇 가지 짚어볼까요?
- 원작의 '저주'를 풀기 위한 21년의 기다림 2003년 원작 <지구를 지켜라!>는 개봉 당시 포스터가 "쫄쫄이를 입은 코믹극"처럼 홍보되는 바람에 흥행에 참패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시대를 앞서간 천재적 영화'로 추앙받으며 할리우드가 판권을 눈독 들였죠. 결국 거장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메가폰을 잡으며 21년 만에 그 한을 풀었습니다.
- 엠마 스톤의 삭발 결심 원작의 강 사장(백윤식 분)이 고문을 당하며 머리칼이 깎이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엠마 스톤은 이 장면의 처절함을 살리기 위해 가발 대신 직접 삭발을 자처하며 캐릭터에 몰입했다는 후문입니다.
- 한국적 '때밀이'와 서구적 '고문'의 변주 원작에서는 때밀이 수건으로 외계인(?)을 고문하는 한국 특유의 정서가 담겼다면, <부고니아>에서는 이를 서구적인 방식의 기괴한 심리 고문으로 치환하여 란티모스 특유의 변태적인 미장센을 완성했습니다.

4. 인간의 본성, '교정되지 않는 폭력성'에 대하여
영화 속에서 안드로메다인들은 인간을 창조한 후 끊임없이 기회를 줍니다. "제발 싸우지 마라, 폭력을 멈춰라"라고 말이죠. 하지만 결과는 참담합니다. 영화는 묻습니다. 과연 인간에게 '평화'라는 DNA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최근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과 지구상에서 멈추지 않는 전쟁들을 보고 있으면 영화 속 외계인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국제 경찰을 자처하던 미국마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지금, <부고니아>가 보여주는 인류 말살은 단순한 SF적 상상이 아니라 섬뜩한 경고장으로 다가옵니다. 성경의 종말을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말이죠.
"인간의 본성이 갈등이라면, 평화는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일지도 모른다."

5. 한 줄 평: "원작을 보지 않았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다"
<부고니아>가 세련된 서구적 냉소주의라면, 원작은 피비린내 나는 한국적 원한과 슬픔이 서려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두 작품을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영화적 경험이 될 것입니다.
지구라는 풍선이 터지기 직전인 2026년 현재,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바늘을 겨누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안드로메다 황제였던 엠마 스톤이 지구인들을 지워버릴때의 무심한 표정이 자꾸만 잔상에 남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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