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25. 23:55ㆍ리뷰

1. 잊혔던 이름, 문장의 파편으로 되살아나다
어떤 작가는 독자의 기억 속에 부표처럼 떠 있고, 어떤 작가는 심해의 가라앉은 닻처럼 존재합니다. 저에게 구병모라는 이름은 아마 후자였을 것입니다. 과거 《아가미》가 선사했던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은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 있었지만, 아들이 건넨 신간《절창》은 그 잠잠하던 바다를 다시금 요동치게 만들었습니다.
작가의 이름에서 풍기는 중성적, 혹은 남성적인 단단함과 달리 구병모의 문장은 지극히 섬세하면서도 서늘한 칼날을 품고 있습니다. 한 달간 집안을 굴러다니던 책이 마침내 펼쳐졌을 때, 저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문장의 미학'이 선사하는 압도적인 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2. 어둠의 심연을 정교하게 세공하다
《절창》은 결코 친절하거나 다정한 소설이 아닙니다. 내용은 자극적이고 잔인하며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일상의 뒷면, 즉 '어둠의 세계'를 들춰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저급한 자극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그 어둠을 묘사하는 작가의 태도가 지독하리만큼 정교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음지의 생태계를 단순히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해부학자처럼 그 내부의 장기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독자 앞에 전시합니다. 낯선 세계에 대한 묘사가 "제법 그럴싸하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의 밀도가 그만큼 촘촘했다는 증거입니다. 예상 밖의 결말은 그 촘촘한 그물망에 걸려든 독자에게 가해지는 마지막 일격이자, 작가가 준비한 가장 서늘한 위로이기도 할 것입니다.

3. '절창(絶唱)' : 폐부를 찌르는 문장의 유혹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어쩌면 서사보다도 '문장'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얼기설기 이어진 문장들의 정교함"과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이라는 게 저의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구병모의 문장은 만연체인 듯하면서도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없고, 유려하게 흐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독자의 심장을 날카롭게 할큅니다.
독자가 이 소설을 읽으며 "나도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 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겁니다. 좋은 텍스트는 독자를 단순히 수동적인 관찰자로 머물게 하지 않고, 창작의 열망을 자극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지금 제가 연습 중인 피아노 곡을 떠올리며 그 지난한 과정의 무게를 실감하는 요즘, 예술의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연마 끝에 탄생하는지는 아는 이만이 느낄수 있을 겁니다.
4. 필사(筆寫), 그 거룩한 재감상의 의지
비늘 돋친 문장들은 눈으로만 읽기에는 아깝습니다. 조만간 다시 읽으며 멋진 구절들을 필사하고 싶다는 생각은, 작가가 정교하게 벼린 문장의 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과도 같습니다. 손끝으로 옮겨 적는 문장은 눈으로 훑는 문장보다 훨씬 더 깊게 영혼에 각인될테니까요.
《절창》은 제목 그대로 피 냄새와 땀방울이 섞인 거칠고도 아름다운 절규에 가깝습니다. 군에서 휴가나온 아들의 손을 거쳐 온 이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소설이, 제 손을 통해 필사의 흔적으로 남겨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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