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망각 위에 피어난 사랑의 기억 ―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2026. 1. 5. 09:27ㆍ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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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딸아이가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난리”라며 적극 추천했을 때, 사실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중년의 문턱에서 이미 오래전 시들어버린 연애 세포가 다시 꿈틀대기엔 세상은 너무나 현실적이니까요. 하지만 딸아이와 나란히 앉아 마주한 한국판〈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의외로 억지스럽지 않게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정갈한 작품이었습니다.
낯익은 서정성, 한국적 색채로 덧입히다
이 영화의 뿌리는 일본 작가 이치조 미사키의 동명 소설에 있습니다. 이미 일본에서 영화화되어 큰 사랑을 받았던 원작을 한국적 감성으로 리메이크한 만큼, 극 전체에는 일본 로맨스 특유의 잔잔하고 서정적인 톤이 흐릅니다.
설정은 가혹하리만큼 애틋합니다. 교통사고로 인해 자고 나면 전날의 기억이 사라지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는 여고생(신시아 분)과, 선천성 심장병을 앓으며 삶의 온도를 낮춘 채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남고생(추영우 분). 매일 아침 '처음처럼' 서로를 마주해야 하는 이들의 사랑은 그 설정만으로도 관객의 가슴 한구석을 뻐근하게 만듭니다.


배우의 피지컬이 서사를 배반할 때의 아이러니
극에 몰입하다 보면 뜻밖의 '현실적 괴리'를 마주하기도 합니다. 선천성 심장질환으로 격렬한 운동은 금기시된다는 설정의 남주인공이, 화면 속에서는 누구보다 탄탄하고 건강한 피지컬을 보여줄 때가 그렇습니다.
“요즘은 심장병 환자들도 고강도 웨이트를 병행하나?”라는 짓궂은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기도 했지요. 청년의 건강한 육체가 질병의 서사를 미세하게 배반하는 순간이었지만, 다행히 배우 추영우는 이를 안정적인 감정 연기로 상쇄합니다. 첫 스크린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제된 눈빛과 섬세한 호흡으로 스토리라인을 묵직하게 견인하며 관객을 납득시킵니다.

세대와 세대를 잇는 '사랑의 창'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감정을 억지로 쥐어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신시아와 추영우, 두 신예 배우가 빚어내는 풋풋함은 과한 신파 없이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부모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들의 사랑은 때로는 위태로워 보여 안쓰럽고, 때로는 순수함에 대견함마저 느껴지는 묘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기억되지 못하는 사랑도 사랑인가"라고 말이죠. 연애 감정이 퇴색된 기성세대에게는 자녀 세대의 투명한 감성을 엿보는 통로가 되어주고, 청춘의 한복판에 선 이들에게는 오늘의 사랑을 더 소중히 붙잡게 만드는 힘이 있는 영화입니다.

총평: 영리한 로맨스, 따뜻한 위로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눈물을 강요하거나 삶의 무게를 무겁게 얹지 않습니다. 그저 흩어지는 기억 속에서도 끝내 남겨지는 '마음의 무늬'를 조용히 응시할 뿐입니다. 딸아이와 어색함 없이 나란히 앉아 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는 꽤나 영리하고 다정한 로맨스라 평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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