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형식 너머의 실체를 더듬는 여정.구병모 미니픽션 <로렘 입숨의 책>

2026. 2. 22. 09:29책 여행

 

최근 구병모 작가의 <절창>을 읽고, 과거 <파과>를 보며 느꼈던 남성 작가 특유의 거칠고 선 굵은 필치라 짐작했던 예단을 작가의 필모그래피 확인과 함께 기분 좋게 배반당했습니다. 그 호기심의 연장선에서 집어 든 단편집 <로렘 입숨의 책>은 작가적 상상력이란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전시장 같았습니다.

‘로렘 입숨(Lorem Ipsum)’은 본래 출판이나 디자인 분야에서 서체나 레이아웃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의미 없는 가짜 텍스트를 뜻합니다. 제목처럼 이 책 속의 단편들은 때로 낯선 언어로 쓰인 대화를 엿듣는 듯 불친절하고 모호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중반부에 들어서야 비로소 전체적인 윤곽이 잡히는 그 불투명함은, 역설적으로 독자에게 극도의 몰입과 사유를 요구합니다.

일론 머스크가 하루 3시간의 사색을 권했다는 숏폼을 본 적이 있지만, 평범한 독자에게 그것은 10분의 명상조차 꿈나라로 이어지게 하는 고단한 숙제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구병모의 불친절한 세계를 헤매는 시간이 어쩌면 그 부족한 사색을 메워주는 훌륭한 차선책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한 문장 한 문장 쥐어짜듯 서평을 써 내려가는 지금도 그 여운은 빈약할지언정, 한 가지는 확실히 체감합니다. 작가가 쌓아온 세월과 경험의 궤적이 얼마나 단단한 실력의 향상으로 이어졌는지를 말입니다.


🔍 알고 읽으면 더 풍성한 도서 정보

1. '로렘 입숨'의 진정한 의미

  • 기원: 16세기 한 익명의 인쇄공이 라틴어 문장(키케로의 저술)을 뒤섞어 만든 것이 시초입니다.
  • 상징성: 구병모 작가는 이를 통해 '내용보다 형식이 우선시되는 세계' 혹은 '채워져 있으나 비어 있는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소외와 소통의 부재를 관통하는 메타포이기도 합니다.

2. 구병모 작가의 필력, 왜 '남성적'이라 느껴질까?

  • 냉소와 건조함: 감정에 호소하기보다 상황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묘사하는 '하드보일드' 스타일 때문입니다.
  • 비정함 속의 숭고미: <파과>의 노년 여성 킬러 '조각'처럼,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존재를 강렬한 서사적 힘을 가진 주체로 그려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3. 함께 읽으면 좋은 구병모의 '상상력' 리스트

 
작품명
추천 이유
위저드 베이커리
구병모의 이름을 알린 대표작. 잔혹 동화적 상상력의 정점.
아가미
몸에 아가미가 돋아난 소년의 이야기. 탐미적이고 슬픈 환상 문학.
네 이웃의 식탁
<파과>와는 또 다른, 지극히 현실적이고 날카로운 사회적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