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길을 잃어도 좋은 낙원, <테라스 하우스: 하와이> 관전기

2026. 1. 28. 15:49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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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추천한 '가장 효율적인 일본어 학습법'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넷플릭스 <테라스 하우스: 하와이편(알로하 스테이트)>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교과서 속의 딱딱한 "데스(です)"와 "마스(ます)"가 아니라, 실제 일본 젊은이들이 숨 쉬듯 뱉어내는 살아있는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거든요. 하지만 결과부터 말하자면, 제 일본어 실력은 제자리걸음이고 대신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만 '만렙'이 되어버린 기분입니다.

 

공부로 시작해 탐구로 끝나는 기묘한 여정

처음 몇 에피소드 동안은 나름대로 비장했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출연진들의 입모양을 살피며, 일상적인 표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한국말을 할 때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듯, 그들도 말을 아주 짧게 툭툭 던지거나 은어를 섞어 쓴다는 사실을요. 문법책에서 배운 정중한 문장들은 하와이의 뜨거운 태양 아래 모두 녹아내린 듯했습니다. 결국 저는 공부라는 숭고한(?) 목적을 내려놓고, 어느덧 화면 하단에 흐르는 자막에 영혼을 맡긴 채 그들의 드라마틱한 일상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갔습니다.

 

순수함이 가고 '끈적함'이 찾아올 때

하와이편은 무려 8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촬영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시즌이 후반부로 갈수록 프로그램의 색채가 오묘하게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초반부에는 갓 스무 살을 넘긴 출연진들이 주를 이루며 '청춘의 순수함'을 뽐냈습니다. 풋풋한 첫사랑의 설렘이나 꿈을 향한 열정 같은 것들이 화면을 채웠죠.

하지만 평균 연령이 20대 중후반으로 올라가는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공기는 사뭇 달라졌습니다. '순수'라는 단어보다는 '끈적함' 혹은 '노련함'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상황들이 펼쳐지기 시작했거든요. 별다른 감정의 교류 없이도 하룻밤의 유희를 즐기는 쿨하다 못해 서늘한 출연진이 등장하는가 하면, 반대로 모든 계산기를 두드려본 뒤에야 발을 떼는 영악한 이들도 나타났습니다.

 

거대한 인간 군상의 전시장

<테라스 하우스>의 진짜 묘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대본이 없다는 이 리얼리티 쇼는 사실 '인간 관계의 민낯'을 보여주는 거대한 실험실과 같습니다.

 

  • 사랑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무모하게 뛰어드는 '순정파'
  • 자신의 커리어와 이미지를 위해 연애조차 비즈니스처럼 관리하는 '전략가'
  • 상대방의 호의를 이용만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는 '회피형 인간'

 

이런 다양한 인간 군상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일본어 리스닝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이 왜 저 상황에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왜 저토록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지 분석하느라 뇌 에너지를 다 써버리니까요. 정이 뚝 떨어질 만큼 계산적인 모습에 혀를 차다가도, 가끔 보이는 진심 어린 눈물에 함께 마음이 동요되기도 하는 그 과정 자체가 묘한 중독성을 발휘합니다.

 

하와이라는 배경이 주는 이질적인 매력

특히 이번 시즌의 배경이 된 하와이는 출연진들의 감정을 더욱 증폭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일본이라는 정서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하와이라는 개방적인 공간이 주는 느긋함이 충돌하며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내죠. 서핑을 하고 아사이 볼을 먹으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저녁이 되면 화려한 저택 거실에서 벌어지는 날 선 설전이나 은밀한 유혹의 공기는 시청자의 눈을 화면에서 떼어놓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치며: 중독의 끝에서

이제 마지막 에피소드를 향해 가고 있는 지금, 저는 더 이상 일본어 공부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비록 "스고이(대단해)"나 "야바이(장난 아냐)" 같은 아주 기본적인 감탄사 외에는 여전히 잘 들리지 않지만, 뭐 어떻습니까. 타인의 삶을 훔쳐보며 나의 인간관계를 반추해 보는 이 시간이 충분히 즐거운걸요.

공부하려고 켰다가 밤을 꼬박 새우게 만드는 이 넷플릭스의 마력. 혹시 여러분도 일본어 공부를 핑계로 이 늪에 발을 들이시려거든 조심하세요. 일본어 실력 대신 넷플릭스 시청 이력만 화려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그 끈적하고도 흥미로운 인간 드라마의 맛을 한번 본다면, 결코 후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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