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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여행

통속적인 과정을 거부했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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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쿠르베(Jean Désiré Gustave Courbet : 1819. 6.10~1877. 12. 31.)는 프랑스 오르낭 지역의 부호 집안에서 태어난 화가입니다.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던 쿠르베의 뜻과는 달리 부모님들은 법관이 되기를 원했죠.

시골 사립학원에서 미술의 기초를 배우긴 했으나, 결국 아버지의 뜻에 따라 파리로 법공부를 떠납니다. 하지만, 화가의 꿈을 버리지 못한 쿠르베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워나가기 시작하죠.

 

자화상. 쿠르베. 사진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이하 사진출처는 동일합니다.

 

1844년 자화상으로 살롱전에서 입선하며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선 쿠르베는 당시의 화풍과는 결이 다른 사실주의 미술에 천착합니다. '천사를 그려달라'는 고객의 요구에 먼저 천사를 보여주면 그려주겠다며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한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 그리는 것을 극혐했다고 하네요.

이런 그의 기질이 농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화폭에 옮긴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어려서부터 반항기가 다분했던 자기 자신을 거칠고 원시적인 반체제인사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미술가 동맹의 회장이었던 그는 정치 활동도 정열적으로 펼쳤었는데, 파리 코뮌이 무너질 때 체포되어 파산하기도 했답니다.

당시의 보수적인 주류 미술계에서는 쿠르베의 작품들을 이단아 쯤으로 여겼슴직 한데요, <돌을 깨는 사람들(1849)>이나 <오르낭의 매장(1849)> 같은 작품들은 농촌의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곤 했으니까요.

 

<돌깨는 사람들>.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 소장. 남루하게 찢어진 옷들과 보호장구도 없이 험한일을 하는 모습...

 

<오르낭의 매장>.

 

온갖 아름다운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비루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당시의 화풍에서 이러한 사실주의 작품들은 비평가들의 비난을 심하게 불러일으켰지만 사실주의 미술의 서막을 알리는 계기이기도 했답니다.

안타깝게도 쿠르베는 파산 후 엄청난 벌금을 피해 스위스로 피신했는데, 육체적으로 많이 쇠약해진 탓에 낡은 여관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하네요.

 

 

쿠르베는 이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우월감을 가지고 상대방을 내려보는 듯한 것으로 묘사했는데요, <안녕하세요 쿠르베씨>라는 그림이 바로 그 문제작입니다.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은 그의 후원자였던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 알프레드 브뤼야스이고 그 옆에 집사가 대동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반려견의 이름은 브레통이었구요. 그림은 프랑스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지요.

부제가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자'인 것처럼, 화가 자신은 고개를 뻣뻣하게 치켜들고 상대방은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브뤼야스가 이 그림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했지만,거절당한 이 작품은 쿠르베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출품했다는 의심을 품게합니다. 거절당하자 박람회장 맞은편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또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했으니까요.

당시의 비평가들은 후원자를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화가의 모습에 조롱과 야유를 퍼부었다고 합니다. 쿠르베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겠지만요...

 

쿠르베의 여러 작품들

 

쿠르베의 작품은 때론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때론 자연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매우 감각적인 누드화를 그리기도 하곤 했으니까요.

프랑스의 유명 미술 학교에서의 전통코스를 밟아나가기 보다는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한 쿠르베는 여러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모사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해 나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했고 영향을 많이 받았던 화가는 렘브란트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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