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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

나이 든 채로 산다는 것. 박홍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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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웨일북. 예스24. 2018년 5월 출간

 

전후 베이비붐 세대엔 한 집에 자녀들이 대여섯 명씩 있었다.

형 누나들이 동생들을 돌보고 키우는 일은 어찌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던 시절이었다.

의료기술도 지금과는 달랐고, 여러가지 이유로 일찍 사망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이후 급작스럽게 불어나는 인구에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살자>는 구호를 외치며 정부에서는 인위적인 인구증가억제정책을 폈다.

'남아선호사상'이 심했던 그 시절에는 불법낙태가 성행했고, 남녀 성비에까지 영향을 미칠 지경이었다. 집안의 장남이 부모를 모시고 살던 전통적인 문화에 기인하여 형성된 그릇된 사회분위기가 만들어낸 기괴한 현상이었다.

 

불과 몇 십년도 지나지 않아, 사회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변해갔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속도를 자랑하는 나라답게,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와 인식 또한 기성세대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변해왔다.

 

사회문화 곳곳에서 과도기적 현상들이 보여지며, 신 구 세대들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문제들은 산적해가고 있다.

 

생로병사(生老死)의 인간사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옛 문화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부분은 없는 것 같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이제 임신 14주 이내는 모든 낙태행위가 허용되고 24주까지는 선별적인 예외상황에서 낙태가 허용되는 법률이 시행될 예정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직 존엄사 문제는 본격적인 논의조차 꺼려하는 상황이지만, 연명치료결정권에 대한 논의는 어느 정도 진척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seteph/unsplash

 

이 와중에도, 나이들어감에 대한 인식만은 변함이 없는 듯 하다.

 

하루 24시간 내내 끊임없이 돌봐줘야 하는 신생아나 유아들은 그들이 지닌 천상의 재능인 귀여운 웃음 한번으로 부모나 돌보미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준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문화가 그리 오래된 건 아니다.

불과 몇 세기 전만 해도, 신생아와 유아들은 새로운 노동력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고 전염병에 취약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해서 출생 후 일정기간 동안은 출생신고 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많아야 세 명 정도만을 낳는 현대인들은 한 둘의 자녀들을 말 그대로 왕자와 공주처럼 떠 받들고 산다.

여성들에게 거의 독박처럼 지워졌던 육아의 짐이 남성들에게도 일정부분 분할되기도 했다.

핵 가족화 되었던 가족의 모습도 육아를 위해 다시 예전처럼 조부모들과 함께 하는 삶의 변형된 모습으로 진화하기도 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청년시절임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하다.

한참 아름다움을 발산해 내는 여성들의 자태와 절정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청년들의 건강한 모습은 인생 리즈 시절임에 틀림없다.

 

@alexandruz/unsplash

 

청년실업으로 고통스럽다고는 하나, 이 시기가 인생에 있어 가장 화려한 시절임에는 변함이 없다.

 

반면, 노년기는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어둡고 외면하고 싶은 시기인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이 언젠가는 끝이 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죽음 직전에는 비교적 기나긴 노년의 시기가 자리하고 있음 또한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마치 그런 시기가 없는 것처럼 혹은 자기에게는 그런 시기가 오지 않을 것 처럼 애써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인간들은 노년의 시간이 '인간'의 운명일 뿐 '나'의 운명처럼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인생론>에서 "자기 생존의 무의미함과 비참함을 느끼지 않고서는 계속 살아나갈 수 없는 때가 머지 않아 닥쳐올 것"이라고 했다.

 

노년기를 비참하게 여기는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몸은 허약해져 젊은 시절과는 달리 활동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만성질환 한 두개 쯤을 지니고 있고, 여러 병의 합병증으로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많다.

비교적 건강했던 노인들이 단순한 골절로 인해 자리보전을 하고 누운 채 더 이상 건강한 생활로 복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jmason/unsplash

 

육체와 관련된 수 많은 쾌락들은 사라지고, 죽음이 가까워 왔음을 실감하는 노인들의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져 버린다.

어린아이들이 작은 어른이 아니 듯, 노인들도 절정기 성인의 몸과 마음이 아니다.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살아오면서 체화된 본인 스스로의 생각때문이라도 노인들은 괜스레 위축되고 외부 시선에서 무시와 조롱을 느끼곤 한다.

꼰대소리를 들어가며 지탄받는 행동을 하는 노인들의 모습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고집과 화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백세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다고 하는데, 건강하게 백세를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인생의 끝 지점에 가까워질수록 각종 질병으로 몸과 마음은 피폐해져 간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참으로 냉혹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실제적으로, OECD 국가중 노인 자살율 1위를 10년째 고수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모두가 한번쯤은 진지하게 성찰해보고 사회적으로도 해결책을 찾아 고심해봐야 할 문제이다.

 

요양병원에 입원하면 노인들을 돌보기 힘겨워 안정제를 장기투여하게 되어 급속도로 상태를 악화시킨다는 풍문은 차치하더라도, 실제로 행복한 노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장소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felixhoffmann/unsplash

 

덴마크 코펜하겐 중앙역 앞에는 티볼리 공원이 위치해 있다.

그 금싸라기 같은 땅에 유락시설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몇 차례 시 외곽으로 이전을 논의했지만, 시민들의 추억이 담긴 장소를 경제적 논리만 따져서 옮긴다는 건 말이 안된다는 여론에 따라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가족과 함께 그 곳에 들렀을 때 참 낯선 장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젊은이들이 주 고객층인 우리나라 **랜드의 모습과는 달리, 말 그대로 남녀노소가 골고루 공원 시설을 즐기고 있었다.

야외 무대에서는 수준 높은 연주회가 열렸고, 무대 앞 공간에서는 나이 지긋한 노년의 남녀들이 부드러운 율동의 춤을 추고 있었다.

얼굴 표정에 어려있는 여유로움이 좋아 보였고, 칠순이 가까워 보이는 나이임에도 굽 낮은 구두를 신고 춤을 추는 할머니의 모습이 자못 아름다웠다.

 

@bangjumbo/unsplash

 

공원 안에 손을 잡고 산책하는 노인들의 모습도 생경하긴 마찬가지였다.

이혼하면 여성들에게 거의 모든 것을 빼앗기기 때문에 남자들이 잘 할 수 밖에 없다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를 들었던 터라 '날 버리지 말아달라!'는 애절함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런 나의 시선에는 아랑곳 없이 말없이 두 손 잡고 산책하듯 걸어다니는 노인분들의 모습에서 인생말년의 푸근함이 느껴져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스쳐지나는 여행자의 눈에 실상이 얼마나 제대로 읽혀졌을까마는, 최소한 노년이 추하고 지옥같아 자살을 선택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느덧 적지 않은 나이에 접어들다보니, 노년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재미있게 읽게 되는 인문한 책이었다.

 

'노년을 사유하고,기대하고, 맞이 하는 법'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언제든지 죽음이 끼어들어 삶이 중단될 수 있는 노년을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좀 더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마음을 다 잡게 하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여러 주제로 소분하여, 주제에 맞는 미술작품을 소개하고 더러는 소설작품 속의 글귀들도 인용하여 아직 살아보지 않은 노년에 대해 생생하게 상상하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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