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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

아랑은 왜. 김영하 저. 문학동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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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학동네. 예스 24

 

어렸을 때 보았던 <전설의 고향>을 언젠가 케이블티비로 본 적이 있어요.

어릴적에 봤을땐 정말 무서웠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게 되니 그 촌스러움에 무섭기는 커녕 피식피식 웃음만 나오더군요.

 

하긴, 대한민국에 좀비가 설쳐대는 시대이니 고전적인 한국의 귀신들마저 약발이 조금 약해지긴 했을거예요 ^^... 사후세계마저도 외국문물에 밀려나는 건 아닌지 씁쓸합니다.

 

386세대만 해도, 표현하기가 좀 그렇지만 한국적인 정서(?)가 나름 묻어나지만 요즘 신세대들은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그런 점들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더군요.

은근히 배어나는 정서이기에 말로 표현해내거나 형이하학적으로 묘사하기는 거의 힘들지만,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문화면에서도BTS, BlackPink등 K-POP 이 세계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인터넷 속도로는 세계최고수준이니, 젊은 세대들이 전통적인 한국정서에만 국한되어 머물기에는 주변환경이 많이 변한 상태이긴 하죠.

코로나로 인해 각국의 경계가 차단되긴 했지만, 사실 코로나 이전에는 거의 국경이 없다시피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했고 또 실제로 세상이 글로벌화되어 있기도 했었죠.

 

@danielklein/unsplash

 

책갈피에 그려진 나비의 모습은 이 소설의 중심부를 가르는 중요한 오브제입니다.

나비 또한 다분히 옛 한국의 정서를 대변하는 아련한 그 무엇이기에, 요즘 세대들에겐 공감할 수 없는 오브제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나비축제 같은 곳에서 보던 인위적인 환경속에서의 나비만을 떠 올릴지도 모르구요.

 

초등학교 시절엔 왜 그리도 학교 운동장에 전교생 집합을 자주 했는지 모르겠네요.

따스한 햇살이 내리던 4월의 봄날...

은은한 봄내음이 사방천지에 깔리고, 적당히 부드러운 봄볕이 안쓰럽게 뜬 실눈을 간지럽히던 때면 꼭 몇 마리의 나비들이 나풀거리며 운동장을 배회하곤 했었죠.

 

공기 속의 먼지가 브라운 운동을 하며 무작위로 이리저리 움직이듯, 하늘 하늘 바람에 실려 날아다니는 나비들의 모습은 뭔가 몽환적인데가 있었죠.

그러다가 운동장에 모여 있던 우리들 중 누군가의 머리 위에 나비가 사뿐히 내려앉기라도 하면, 마치 무슨 선택받은 선민이라도 되는 양 그 사람이 달리 보이기도 했구요.

착각은 자유니까요...

 

그런데, 이런 애틋한 감상을 엉뚱한 곳에 이용한 사람이 있었네요.

억울하게 살해당한 처녀의 영혼이 나비가 되어 살인범을 지목한다는 설정으로 말이죠.

 

손버릇이 나쁜 누군가를 잡겠다고, 교실 내에서 도난사건이 발생하면 담임선생님이 하던 일이 있었죠.

모두 눈을 감게 한 뒤, 자수하여 광명찾자는 것 말이예요.

제 기억엔 그렇게 자수할 기회를 주어도, 한 번도 자수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담임선생님의 눈에는 손을 들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는 분명 다른 애와는 현저히 다른 몸짓을 하고 있어서 충분히 심증이 가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띄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때만 해도 애들이 참 순진했거든요.

 

@cdc/unsplash

 

<아랑은 왜?>라는 소설은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실험적인 글입니다.

시나리오 작가로써 이런 저런 구상을 해보는 과정과 소설적 요소들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구전 설화까지 접목시켰으니까요...

 

그래서인지, 김영하 작가의 책 치고는 처음엔 조금 헷갈리기도 했어요.

지금까지 읽어 온 김영하 작가의 책들은 참 선명하게 이미지를 만들어내곤 했고, 그 색깔 또한 확연했기 때문이죠.

초반부의 어리둥절함은 이런 실험적인 시도로 인해 개인적으로 느꼈던 이질감이었고, 역시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간 느껴왔던 김영하식 필체들이 되살아나더군요.

 

언제나처럼, 방대한 양의 리서치와 공부를 한 티가 납니다.

좋은 소설 한권 쓴다는게 녹녹치 않다는 걸 느끼게 해주죠.

흡인력도 좋아서, 금방 책 내용에 빠져들게 되구요.

하지만, 여백이 너무 많아 책 두께만 두껍게 해 놓은 듯 하기도 해요.

거의 중편분량이 안 되는데 말이죠.

 

똑같은 사건이라도 이리저리 비틀어보고 의심을 품어보고 각색 내지는 윤색을 해보는 브레인스토밍 작업은 지적유희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루틴과도 같은 과정일겁니다.

 

<아랑은 왜?>가 다루는 민담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부임하는 사또마다 부임 첫 날 비명횡사하는 어느 고을에 용감한 신임사또가 등장합니다.

부임 첫 날 밤, 사또 관저에 찾아드는 검은 그림자...

그것은 처녀귀신이었지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한을 풀어달라며 찾아온 처녀귀신을 보고서 심약한 이전 사또들은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은 거였지요.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용감한 사또는 처녀귀신을 호탕하게 야단치며 꾸짖습니다.

감히 요사스럽게 인간에게 해꼬지를 한다면서요...

사또의 기개에 감탄한 처녀귀신은 잘못을 빌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사또는 처녀귀신의 하소연을 들어주어 처녀를 범하고 살해한 범인을 찾아내 벌한다는 내용입니다.

 

 

사또가 처녀를 살해한 범인을 잡아내는 데 사용하는 것이 바로 '나비'이지요.

관아 내의 관비들 중에서 범인이 있다는 처녀귀신의 하소연을 토대로 관노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죽은 처녀가 나비로 환생하여 범인의 머리위에 내려앉기로 했다고 뻥을 치고서는 관노들을 모두 눈 감게 하지요.

조금이라도 꼼지락대는 노비는 몽둥이찜을 당했으니, 그야말로 나비의 날갯짓 소리까지 들릴지경이 됩니다.

사또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은 범인은 이미 다리가 풀려 "네 이노~옴"하고 호령하는 사또의 큰 소리에 혼비백산한 상태가 되어 그냥 주저 앉아버렸지요. 자백한 셈이죠.

범인이 죄 짓고는 못 사는 비교적 순박한 심성을 지녔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요.

@rayhennessy/unsplash

 

언젠가 <전설의 고향>을 통해서 본 것 같기도 한 내용이구요, 어렸을 적에 읽었던 동화책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합니다.

똑같지는 않더라도, 유사한 내용이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거나 보고만 지나쳤던 이 이야기를 <아랑은 왜>라는 소설에서는 다양한 각도로 디테일을 살려서 펼쳐내니 김영하씨는 타고난 이야기꾼인 게 확실하네요.

이와 같은 민담(?)을 가지고서 김영하 작가가 어떤 썰을 풀어나가는지 궁금증이 드신다면 제 글에 낚이신 거지요.

지적유희를 즐길 수 있는 책이구요,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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