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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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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학동네. 예스 24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클림트의 <유디트> 그리고 들라크루와의 <사르디나팔왕의 죽음>...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척 보면 알수 있는 유명화가들의 너무나도 잘 알려진 작품들...

이 작품들의 공통 주제는 바로 죽음입니다.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책 제목도 자살이라는 단어를 암시하는 것 같네요.

 

얼핏 보면 서로 다른 내용을 다룬 5개의 장을 엮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 같지만 내용들이 서로 연결되는 이 작품은, (김영하 작가의 특성처럼 보이는) 추리소설식의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등장하는 4명의 인물들이 펼치는 에피소드들이 교차편집되어 있습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다루기에는 너무 짧은 분량의 소설이긴 합니다만, 주저리 주저리 양만 늘려 얘기한다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 강렬하거나 효과적이란 법은 없지요.

 

다비드. 마라의 죽음.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이하 사진의 출처는 동일함

 

아무런 사전 정보도 검색하지 않고 책을 읽을 때 더 재미있는 경우가 있고, 적절한 스포일러를 접한 뒤에 어느정도 작품 배경에 대한 지식을 갖춘 뒤에 읽을 때 더 재미있는 책도 있지요.

 

이 책은 사전 지식 그런거 필요없습니다. 하지만, 뭐랄까...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다보니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개운치 않게 남아있는 그런 느낌의 책이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니까 뭐라 하지는 마시길...^^

 

김영하 작가는 어린 시절 너무 잦은 이사로 인해 친구들과의 깊이 있는 우정을 나눌 기회를 박탈당한 것으로 여깁니다. 부대장이었던 아버지의 직업 특성상 자주 군부대를 이동해야 했고, 1년 만에 전학을 여기저기로 다니다보니 어린나이였지만 끈적한 인간관계를 맺기 힘들다는 걸 느꼈던 모양이더군요.

 

후생유전학은 가지고 태어난 유전자를 제외하고 출생 이후의 환경에 따른 적응과 관련된 정보들이 유전자에 새롭게 각인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것들에 관한 지식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후생유전학적 분석에 의하면 인간은 타고난 특성도 중요하지만 살아가는 환경 또한 무시못할 영향을 받는 요소라는 거지요. 우리주변을 둘러봐도 그런 증거들은 넘쳐나게 많습니다.

범죄자들의 환경은 대부분 불우하지요.

 

클림트. 유디트

 

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환경에서 싸이코패스가 나오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세대를 넘어 전해지는 유전정보로 개인의 특성이 결정되는 면이 있지만, 태어난 직후부터 잘 기억하기 힘든 어린 시절까지의 경험들이 평생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어린시절의 고통스런 기억 때문에 비뚤어진 성격이 형성되고 이로 인해 인간관계에 서툴고 반 사회적인 행동을 일삼는 사람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요.

 

김영하 작가는 본인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엔 너무 어렸던 시절에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만들지 못한 환경때문에 늘 유목민과 같은 느낌을 갖고 살아왔다고 회상합니다.

 

우리들 모두는 어린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모습 중 못 마땅한 부분에 대한 합리적인 변명을 찾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어린시절의 경험들은 불행히도 바꿀수도 지워버릴수도 없이 이미 우리 뇌리속에 그리고 유전자 속에 깊이 새겨져 있지요.

 

들라크루아. 사르나다팔왕의 죽음

 

모국어를 쓰는 한 나라안에서만 이리저리 이사를 다녔음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방랑하는 유목민과 같은 삶처럼 어린시절을 기억하는 작가는, 그래서인지 늘상 안정적인 그 무언가를 갈구합니다.

그 극한의 지점이 우리가 흔히 '영원한 안식'이라 일컫는 죽음일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우리들은 죽음이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그리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잘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때문이겠지요. 늘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은 익히 우리가 잘 아는 것들에게서 받는 느낌이지, 새롭고 낯선 것들은 항상 두려움을 수반하지요.

죽음에 대한 첫 경험들은 개개인들마다 각양각색의 모습이겠지만, 본인의 죽음을 경험하고 얘기한 사람은 역사적으로 단 한사람 뿐입니다. 종교적으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이겠지만요...

 

작가가 신이 되어 그의 작품 속에서 창조하는 인물들은 작가의 역량에 따라 현실적이고 생생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허황되고 거짓된 캐릭터가 되기도 합니다.

작가가 고심끝에 쥐어짜낸 문장들이 독자들에게 얼마나 큰 감흥을 일으키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인 듯 하구요.

 

이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은 문장들에서는 너무 경탄스러운 점들이 많았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큰 줄기는 조금 못마땅하다는 거였어요.

아마도 유명 미술작품 3점을 책 초반부에 실고, 작품의 주요 소재처럼 사용하였지만 결론적으로는 '유디트'라는 이름만 차용해 왔을 뿐 소설의 내용은 미술작품의 주제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기대했던 것과의 간격이 크게 벌어진 탓으로 보입니다.

마치 현란한 액션을 선보이는 예고편에 잔뜩 기대를 하고 보러갔던 영화가 예고편이 다였던 경우처럼 말이죠...

그만큼 3점의 미술작품이 지니고 있는 배경스토리나 주제가 드라마틱하고 강렬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이들 작품들을 보면서 이 책을 구상했을 거라는 추측을 했었고 그러다보니 예상했던 내용들은 지극히 뇌피셜인 부분이었죠.

 

@belchev/unsplash

 

하지만, 무심히 스쳐지나는 일상의 풍경들을 잡아내서 현란한 문장으로 영상화 해내는 문장력에 몇 번을 감탄했는지 모릅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듯, 글자를 읽는 도중 전두엽 부근에서 자동으로 영상화되는 것들은 그간 어디선가 보았던 것들이겠으나 너무나 디테일한 관찰력과 분석력이 돋보여 그의 작가적 재능이 정말 부럽더군요.

읽을 때는 너무도 그럴싸해 그리 어려워보이지 않아도, 막상 글을 쓸때는 따라하기조차 버거운 그런 표현들이 수시로 등장하니 책을 읽어나가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어요.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나 <키스>를 보기위해, 빈의 벨베데레 궁전의 미술관을 찾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죠.

그것도 모르고 저희 가족은 그 먼 곳에 갔으면서도 궁궐 내의 놀이터에서 놀다가 왔었죠.

그때는 미술에 대해 관심도 거의 없었고,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들렀던 상태라 뭐랄까 조금 질렸달까? 유럽 전역에는 성당과 예술작품이 말 그대로 지천에 깔려있기에 이방인의 눈에는 그 희소가치가 떨어졌던 거겠죠.

 

비엔나. 벨베데레 궁전

 

사실 지금도 유명세를 떨치는 작품들과 다른 미술 작품들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합니다. 막상 유명 미술작품이 걸려 있는 미술관에 가보면 수 없이 많은 엇 비슷한 작품들이 전시실 안에 가득하지요.

비 전문가의 눈에는 오십보 백보인 작품들이 너무도 많이 걸려있으니, 금방 질리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유명세가 있는 작품보다 오히려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들이 따로 있더군요. 지금처럼 즐길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에는 최고의 유흥거리였겠지만, 요즘 세상에 미술작품을 즐기는 사람이 그 시절만큼 많을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작품에는 꽤나 자극적인 성묘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고, 그 시간에 형의 집에서 성관계를 갖는 동생(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죠. 청소년기에 가출을 한 이유에 대해서도요)...

 

얼마 지나지 않아 형과도 성관계를 갖는 여자 유디트... 유디트는 자위행위를 하면서, 그 모습을 형에게 보여주며 유혹을 하죠. 막상 성관계를 할때는 츄파춥스를 빨아먹으며 딴청을 피우고 말이죠. 그리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들죠?

 

형은 상담사역을 자처하는 글쓰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상담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자살을 도와주기도 하는 그가 독자들에게 전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죽음'이란 화두를 끊임없이 되새기게 합니다. 2010년 출간한 작품이니, 그새 10여년의 시간이 흘렀네요. 하지만, 지금 읽어도 제법 충격적인 이야기들이니 출간당시에는 상당히 센세이셔널 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광수 교수처럼 퇴폐저작물로 여론몰이 당하지 않고, 오히려 도시적 감수성을 냉정한 시선으로 남아냈다는 평을 받았더군요.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이네요. 물론 두 사람 작품의 질적 비교는 불가하지만요.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떼기 힘들정도로 속도감 있고 재미있는 소설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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