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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단상] 트라우마 극복하는 방법을 고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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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trauma)의 사전적 의미는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이라고 합니다. 상처를 의미하는 트라우마는 원래는 육체적 트라우마(신체적 외상)와 정신적 트라우마 등으로 분류해서 쓰이지만, 요즘 트라우마 하면 대개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원래의 의미는 따로 있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쓰는 의미가 따로 있기도 하니까요.  트라우마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어 τραῦμα(트라우마) 에서 유래했는데 상처라는 뜻이라고 해요.

 

우리들 각자는 크고 작든 혹은 알든 모르든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험난한 인생살이 속에서 아무리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단 한 번의 트라우마도 입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지요. 이는 사람이란 동물은 불가피하게 생의 초반 수년동안을 타인에게 의지하여 살아갈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타인이 나와 교집합 부위를 갖을 수는 있으나 완벽하게 나의 욕구를 채워줄 수 없기 때문이죠.

 

 

 

지난 학창시절... 군대문화가 구석구석 스며든 교정에서는 이런 저런 폭력이 난무했었지만, 늘 그래왔고 졸업할 때까지도 그랬기 때문인지 그것이 폭력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지났더랬죠. 지금은 사라진 교과목인데 교련이라 하여, 학생들을 준 군인으로 양성하는 교과목이 있었죠. 교련선생은 은퇴 내지 중도에 군대를 빠져나온 퇴역장교들이었는데, 교육을 빙자해 몽둥이질을 일삼던 사람들이 꽤 있었죠.

고1담임은 시험성적에 따라 떨어진 등수만큼 매질을 해대던 사람(아마도 새디스트였지 않았나 싶은데요... 학생들을 갖은 핑계를 걸어 하루도 구타없이 지나는 날이 없었으니까요... 사람 패는 맛도 장난 아니라던데...)이었는데, 신나게 두들겨 맞은 일주일 뒤 엉덩이부터 종아리까지 보랏빛 피멍으로 끔찍하게 변색되었던 비쥬얼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우습게도 성적이 떨어져 맞을 짓을 했다고 생각했던지 피멍자국을 보면서도 크게 억울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기억도 나네요. 보기만 끔찍하지 그때 즈음엔 별로 아프지는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죠. 요즘같으면 이런 폭력이 자행된다면 난리법석도 아니겠죠? 조선시대 머슴들이 개돼지처럼 주인들에게 맞으면서도, 그렇게 운명으로 알고 주인들을 위해서 일을 했었나봅니다. 사람도 길들이기에 매인 것이지요...

 

 

하지만, 육체적트라우마와는 달리 정신적 트라우마는 끔찍한 후유증을 남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단 한차례의 성폭행으로도 평생을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고, 어린시절의 학대나 학교폭력들도 적지않은 후유증을 남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 학폭문제는, 사회구석구석에서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크고 작은 폭력과 크게 다를바 없습니다. 아무리 문명화된 사회라고해도, 인간의 폭력성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약한 이들은 수 많은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실상입니다.

 

 

안타깝게도 폭력의 독성을 중화시킬 맷집이 형성되기 전, 트라우마를 입게 된 사람들의 향후 삶은 시시때때로 심하게 흔들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폭행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지난 일이야. 다 잊어버려. 너만 힘들뿐이야.'라고 아무리 설득한다 한들, 그 지옥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학폭피해자들에게도 '진심을 담아 사과한다.'는 궁지에 몰린 뒤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 내뱉는 가해자의 말이 치료제가 될 수 없듯이 말이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고통을 같은 시간만큼 되갚아준다면, 조금이나마 치유될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미 깨져버린 접시조각들을 애써 그러모아 붙인 들 원상이 되지는 않을겁니다.

 

 

 

제 지인 중 한 분은 어린시절 이웃집 개에게 호되게 물린 뒤, 개라면 경기를 하시는 분이었죠. 같이 길을 걷다가도 반대쪽에서 오는 반려견이 좀 흥분한 상태같아 보이면 아예 멀찌감치 떨어져 걸을 정도였었죠. 그러던 분이 어느날엔가 반려견을 동반해서 나오셨더군요. 애들이 하도 키우고 싶어해서 집에 들였는데, 결국은 자기가 돌보고 있다고 하면서요...

그 사이 무슨일이 있었을지는 그리하여 트라우마를 어떤 식으로 극복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아직은 다른 사람들의 반려견에 대해서까지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개에 대한 트라우마가 희석된 상태임은 확실합니다.

 

심플한 예를 들긴 했지만, 대부분의 트라우마는 이처럼 쉽게 해결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트라우마로 인한 후유증은 조울증, 우울증, 강박장애, 피해망상, 무기력증 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관리가 필요하지만, 우리사회가 선진국에 진입했다고는 하나 경제적으로는 확실히 여유로워졌지만 타인의 트라우마까지 감싸안을만큼 구성원들의 성숙도가 무르익었다고 보기엔 여러모로 무리가 많지요.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몫 또한 고스란히 피해자의 것입니다.

 

 

OECD 자살율 1위를 수년째 유지하고 있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은 이러한 사회환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역대 최고의 비호감 대선을 앞두고, 계속 터져나오는 소위 사회지도층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태들은 우리사회의 지난 트라우마 또한 슬슬 자극하는 것 같습니다.

무늬만 민주주의이지 절차나 선진 시스템들이 아직 정착이 되지 못한 얼치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폭력과 공포가 난무했던 지난 철권정치의 트라우마가 또 다시 재현되는 것 아닌가 싶은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툭하면 쏴대는 북한의 미사일을 보면서 아무리 무뎌졌다지만 전쟁의 공포를 느끼지 않는것도 문제겠지요.  유한의 짧은 삶을 살면서 정신줄 꽉 부여잡고 빠리빠리하게 살라는 채찍질인 걸까요?

 

트라우마로 신음하며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보며 그 해결책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이런 저런 스쳐지나는 상념들이 많아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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