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한창의 나이 33세에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작가는 이후 이혼과 우울증을 겪고 사랑하는 부모님과 누이를 잃고, 가장 사랑하는 손자마저 자폐증 진단을 받습니다.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된 그의 인생역정 속에 침잠해 있는,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회환들에 대해 조용히 생각해봅니다.
비슷한 내용의 정신과 상담을 책으로 펴낸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그들에게서는 마음을 울리는 그 무언가가 빠져있는 경우가 많지요.
타인의 고통까지 끌어안을 만큼의 심적 여유가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타인의 불행을 나의 다행스러움으로 인식하는 무의식적 기전에 대한 반항때문일까요?
하지만, 뉴스를 접하건 구두로 소식을 듣건 간에 타인의 불행을 듣는 순간 현재의 나에게는 그런 불행이 아직까지는 닥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충격적인 안쓰러움 뒤에 스멀스멀 솟아오름은 모두가 부인하지 못할거예요.
쓸데없는 상상이지만, 작가처럼 내가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었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봅니다.
오늘도 운전대를 잡고 여기저기 다녀왔지만, 실은 제가 모르는 아찔한 교통사고의 순간들이 간발의 차이로 지나갔을 수도 있을겁니다. 교통사고 희생자의 상당부분이 자신의 잘못보다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 가해차량에 의해 발생할 겁니다. 주변에도 교통사고로 인해 크게 다쳐 오랜 기간 치료를 받은 분들이 적지 않지요. 그런 생각만으로도 괜시리 모골이 송연해지네요. 그렇죠...
어찌보면 제 인생 또한 수 많은 행운과 불운의 날실과 들실들이 요리조리 얽혀있는 거미줄 같은 공간을 하릴없이 지나가고 있는 중이겠죠.
작가의 아내 또한 암투병을 해야만 했는데, 그로 인해 작가의 두 딸들은 어린 시절을 불가피하게 불행 속에서 보내야 했을 거 같더군요. 부모 양쪽모두가 아파서 제대로 된 사랑을 받을수 없는 환경인데다, 어떤 이유에서건 부모의 이혼은 아이들에겐 커다란 흉터를 남길테니까요.
이 책은 작가가 교통사고를 겪고 전신마비가 된 후 20년이 흘러 둘째 딸이 낳은 유일한 손자가 생후 14개월때 자폐증으로 진단을 받자, 손자에게 세상과 인생에 대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공감할 만한 인생의 지혜로 가득차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같은 이야기라도 경험자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훨씬 공감이 가고 진실하게 느껴지게 마련이죠.
책 속에는, 어느 날엔가 비슷한 교통사고로 비슷한 장애를 갖게된 20대 청년이 작가의 조언을 듣기 위해 방문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작가는 그간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정말 진솔하게 알려주고 또한 미래의 희망에 대해서도 나름 소상히 알려주는데, 그 청년과 청년의 어머니는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며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떠나죠.
이들이 떠난 직후 작가는 주체할 수 없이 펑펑 울었다는 군요.
20대 청년이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 곧 자신이 지난 세월 거쳐왔던 수 많은 오욕의 순간들을 생각하니 안쓰러운 생각이 절로 들었다는 거지요. 전신마비가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지고, 소변줄을 꼽고 침대에 누워 있거나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해야하는 일이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겠죠. 게다가 앞으로 좋아질거라는 희망이 전혀 없는 상태라면 더욱더 힘들었을 겁니다. 아니, 단순히 힘들다는 표현으로는 많이 부족하죠.
그런 우울하고 힘든 상황을 작가는 과연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그냥 죽지 못해 버티니 현재까지 온 것이라고 담담히 얘기합니다. 사실 왕성한 생명력을 거슬러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것도 대단히 힘든 일이죠.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사람들도 오죽하면 그런 일을 벌이겠습니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방황하며 작가 스스로 본인에게 되물었던 질문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의 내 삶을 과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였다고 합니다.
온 몸이 뻣뻣하게 마비되어 사랑하는 이들을 더 이상 꼭 안아줄수도 없고 화장실에서 혼자 변을 볼수도 없는 그의 입장에서 '인간다움'이란 질문은 정말 참담한 일이었을 겁니다.
재력이나 미모,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 등으로 누군가를 정의하는 물질적이고 각박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각기 저마다의 삶의 공식을 만들고 반드시 지켜야할 기준선을 설정하곤 하죠.
거기서부터 더 높은 곳을 향해 발버둥치고 사는 동안 참 많은 것들을 잃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가는 '내려놓음'과 '휴식'의 가치에 대해 조용히 알려줍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피치못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 전에 수 많은 걱정과 불안 속에 휩싸여 살게 됩니다. 벗어나려해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건만 우리는 기어코 벗어나려 몸부림치며 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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