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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행

말 못하는 사람. 성석재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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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성석재. <출처 : 연합뉴스. 포토뉴스>

 

 

<투명인간>의 소설가 성석재가 산문집을 냈다. 투명인간에서도 문장 하나마다 톡 톡 튀는 페이소스(Pathos)를 유발하더니, 그 만의 체취어린 필체는 여전하다.

마치 쉬지 않고 유머러스하게 은유적으로 얘기하는 영국 신사처럼, 그의 글은 시시콜콜한 재미를 준다. 좀 더 한국적이고 좀 더 투박하게... 이 책의 첫 산문 제목이[개구멍 속의 기차]이다.

개구멍... 어떤 글이 펼쳐 질지 알만하지 않은가? 실제로도 실망시키지 않는 재미 있는 추억들이 책 위에서 신나게 상영된다. 비록,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해하지 못할 정서가 될 가능성이 많긴 하지만...


산문집이라 해서에세이집과는 무슨 차이가 있나궁금해진다. 또한 수필과는 무슨 차이이지?

고등학교 시절에 배우긴 했었던가? 긴가민가...하여...

결국 검색을 해 보게 된다.

 

문학은 형식에 따라 크게 운문과 산문으로 나뉜다.

- 운문 : 운율이 있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학. 대표적인 게 시(時)이다.

- 산문 : 율격같은 외형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문장으로 쓴 소설, 수필 등.

수필과 에세이는 같은 말이다.

 

네이버 지식 iN에 누군가 위와 같은 답을 달아놓았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에세이란 개념과 수필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기에 좀 더 검색을 해 보았더니 이런 글이 있다.

 

https://tip.daum.net/question/39388176  수필과 에세이의 차이점과 공통점은?

링크 왔다갔다 하기 귀찮아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요약하면... 현대에는 수필을 문장의 가볍고 쉬운 느낌의 정도에 따라경수필 중수필로 나누고, 무겁고 깊이 있는 느낌의 문장을 일컫는 중수필에 해당하는 것들이에세이라 한다는 것이다.

일정한 주제에 대해 체계적인 논리 구조와 객관적인 관찰이나 데이터를 근거로 쓰여진 글또한 에세이라 불리는데, 영국 학교의 숙제들도 대부분에세이'라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판단하자면, <말 못하는 사람>의 글들은 경수필에 가깝고, 굳이 분류하자면 에세이라 하기 조금 곤란한 면이 있어 산문집이라 한 것 같다.

근데, 그런 면에서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다면 에세이라 부를 수 없는 수필집들도 많다...

하지만, 전문적으로 이런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도 아닐진데 굳이 이러쿵 저러쿵 따지고 드는 일도 우습다. 제사엔 관심없고 잿밥에만 신경 쓰는 꼴처럼....

 

출처 : 문학동네. 예스 24. 2019년 11월 출간

 

<말 못하는 사람>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억 편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더듬으며 소설가다운 필력을 과시한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들, 그 시절 그 상황이었으면 누구나 할 법한 일들을 그다지도 감칠나고 재미있게 묘사하는 것 자체가 천상 글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 말이다.

... 내가 회사 안에서든 회사 밖에서든,

학교 안이든 밖이든,

남과 다른 리듬, 다른 장소를 찾아 다니면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본인이 다니는 회사에 Y대 법대 동기가 경력 사원으로 들어왔는데, 그 동기가 저자를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고 먼저 알아채지 못한 자신을 변명하는 말을 저런 식으로 애둘러 말한다.

법대생이면 고시를 치르던 안 치르던 남학생들은 4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는 분위기에서, 성석재는 2학년 때 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성석재는 경상북도 상주태생으로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 문학 동아리인 "연세문학회" 활동을 하였고, 1986년 6월 문학사상 시 부문에서 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등단하였다.

 

1991년 첫 시집 <낯선 길에 묻다>를 펴냈고, 1994년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펴내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해학과 풍자, 과장, 익살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국면을 그려낸다는 것이며 소설, 에세이, 칼럼, 산문등 전방위적인 창작활동 중이다.

현재까지 2권의 시집, 30여권의 소설집과 장편소설, 산문집, 동화를 발간했고,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되어 중국,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출간되었다고 한다.


책 표지에 실린 오렌지 색 공중전화기를 기억하는 이는 틀림없이 30대 후반 이상일 터이다. 책 표지를 보며 옛 회상에 잠길 이유가 있는 세대들 말이다.

속물스럽게도 소설가의 이력을 검색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 시절에 연세대 법학과면 공부에는 이골이 난 사람일텐데 대학재학 중에 시인으로 등단하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갖다니... 고시 공부가 체질에 안 맞았나보군..'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근데, 책을 읽다보니 이런 문장이 나오니 파안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P53

...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가 이런 것이다.

"시를 쓰신다? 전공이 국문학인가요?"

"아닙니다. 법학입니다."

"잉? 법학? 법학 하는 사람이 고시는 안 하고 어떻게? 아하, 고시가 안되니까 공부를 하다가 바꿨구만. 나도 옛날 절에서 공부할 때 그러는 사람 많이 봤소. 공부해도 안되니 문학 한다 하대."

 

내가 잠자코 있으면 그다음 질문은 보나마나 어느 대학 나왔느냐로 이어지고..

"아이고, 그 좋은 학교 법대씩이나 나와서 시나 쓰고 있다는 말이요?"하고 시와 나의 모교와 법학과 내 인생 전체를 욕보인다...

그런 경우에 나는 그렇게 말하는 상대의 학교, 전공, 직업, 인생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함구함으로써 '부작위적 보복'을 하곤 했다.

 

부작위'란 말은 법률 용어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일부러 하지 아니함을 일컫는다.

자신의 전공을 십분 발휘한 (?) 문장이다.

하여간,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이 되어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 얼마나 많은 편견과 잘못된 저울질로 상대를 평가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문득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러고도 또 남은 생애를 엇 비슷한 실수를 이어가며 살지도 모르겠지만... 습관의 힘은 참 무섭다.

 

2부 [편력]편을 지나 3부에 오면 이책의 제목과 같은 글이 나온다. [말 못하는 사람]은 요즘 세상에선 보기 드문 말더듬이였다. 왠일인지 모르지만, 현재 내 주변에서 말 더듬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게다가 최근엔 그런 사람과 마주친 기억도 없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말더듬이가 많이 줄었음에 틀림없다.

그나마, 내가 기억하는 말을 더듬는 사람들도 모두 남자이다.

언어감각이 남자보다 훨씬 뛰어난 여성에게서 말더듬이는 나오기 힘들지도 모른다.

 

 

P128

... 고금의 '말씀 고수'들은 말한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색해진다고.

기왕 말을 할 것이라면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애매모호하게, 사람들이 각자 바라는 대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을 남겨야 영향력이 강해진다고.

상대를 깎아내리고 상처 입히는 자기 주장으로는 일시적으로 이긴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결국 스스로의 속셈만 드러낼 뿐, 지고 만다고...

 

웃고 떠드는 동안 묵직한 한방씩을 안겨주는 혜안의 소유자처럼, 그의 글은 참 읽는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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