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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여행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o Paganini. 24개의 카프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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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파가니니 (Niccolo Paganini : 1782 ~ 1840)

 

클래식 음악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낼 정도의 신기에 가까운 연주를 하여 당대 사람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바이올린 연주 실력을 거래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리웠다.

 

바이올린을 연주하기에는 최적인 '거미손'의 소유자였던 그는 늘 새로운 연주법을 비밀리에 연구했다.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피나는 노력을 했던 그는 아쉽게도 제자를 두지 않아, 그의 주법은 전해지지 않는다.


니콜로 파가니니. 24개의 카프리스

 

<24개의 카프리스>는 바이올린으로 펼쳐 보일 수 있는 연주 기교를 총망라한 파가니니의 작품이다.

유튜브에 그의 곡 <24개의 카프리스>를 정리해 놓은 동영상이 있다.

 

영화 속 파가니니역에는 독일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비드 가렛이 출연했고, 약간의 허구를 섞어 파가니니의 일생을 영화화 했다고 한다.

 

아래 동영상의 설명을 듣고 보니, 참으로 대단한 곡이다.

영화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카프리스 24번 총정리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까무러치는 여성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참으로 우여곡절도 많은 삶을 살다갔던 음악가이다.

 


 

파가니니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항구 도시 제네바의 가난한 수레꾼이었다.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파가니니가 음악적 재능을 보이자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연습할 수 있게 해주었다.

14살때 처음 열었던 그의 연주회는 어린 소년의 신들린 연주로 대 성황을 이룬다.

 

파가니니가 활동했던 19세기 초는 왕족이나 귀족들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음악가들이 시민혁명과 함께 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자신의 활동영역을 넓혀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과도기를 잘 이용해 유럽 순회공연을 하며 인기몰이를 한 파가니니는 사업감각이 굉장히 뛰어난 편이었다.

 

24개의 카프리스. 사진출처 : 네이버 이미지

 

파가니니는 새롭게 개발한 대담한 연주법을 협연하는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에서마저 공개하지 않았다. 연주의 하이라이트는 실제 공연에서만 보여줌으로써 '신비주의 전략'으로 그의 몸값을 올렸다.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되면 몇 시간이고 연주를 하지 않았고, 관객들은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기 위해 기약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수년간 파가니니를 쫓아다녔던 영국의 열혈팬은 파가니니가 묵는 호텔들을 따라다니며 연주하는 소리가 새어나오기를 고대했으나, 한번도 연습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가 비밀리에 어디에서 연습을 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파가니니. 사진출처 : 네이버 이미지

 

파가니니의 탁월한 바이올린 연주 기교는 이후 리스트, 슈만, 브람스 등의 낭만파 작곡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음악가들로부터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의 마술사', '바이올린의 왕'이라고 불리웠다. 신기에 가까웠던 탁월한 그의 바이올린 연주 실력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대가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도 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패셔니스트로써 그가 쓰고 다니는 모자와 옷, 장갑 등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고 하니, 당시 그의 인기는 요즘 최고 아이돌 스타급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말년에 악기상으로도 성공했는데, 당시 가장 훌륭한 바이올린으로 인정받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대신 후속주자인 '과르네리우스'와 손을 잡아 악기품질의 보증서가 되었고 스트라디바리우스와 쌍벽을 이룰만큼 입지를 굳히게 만들었다.

개인적인 부와 명성과는 별개로 파가니니는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고, 젊은 시절 걸렸던 매독과 치료제로 쓴 수은의 부작용으로 몸이 많이 망가졌다.

말년에는 투자 실패까지 겹쳐, 재산의 대부분을 날리고 후두결핵으로 목소리마저 잃게 되고 14살 어린 아들만이 홀로 그의 곁을 지켰다.

 

파가니니. 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 디아트라운지(theartlounge)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소문에다가 생전 교회에 기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회에서는 장례식 집전은 물론 교회 묘지도 내주지 않아, 36년간을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이곳저곳을 떠돌았다고 하니 파가니니는 죽어서도 수난이 멈추지 않은 불행한 음악가였다.

 

아무도 그의 연습과정을 보지 못할 만큼 '신비주의'를 고집했던 그는 후배를 아무도 키우지 않은 채 음악인생을 마감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연주기법을 연구하고 개발했던 천재바이올리니스트는 음악에 몰두하여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시킨 사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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