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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의 의미론. 타다 토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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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울, 예스 24. 2010년 출간

 

   예전에 유행하던 썰렁한 농담 하나.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은?" 답은 "냉장고를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그리고 문을 닫는다."였다. 개그 프로에서도 이를 풍자한 코너가 있었다... "그까이꺼, 대~충 ....하면 되쥬~" 하며 어려운 일을 마치 손바닥 뒤집듯 쉽게 할 수 있는 것 처럼 말하는 것이다. 근데 실제로 주변에 이런 사람이 정말 있다.

   요즘엔 이 농담에서 해결책들이 직업 분야별로 다르게 진화되었다. 대학원 사회에서는 "조교를 시킨다.", 방송가에서는 "방송작가에게 맡긴다.", 대학병원에서는? 당연 "인턴에게 시킨다!"이다. 물론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갑을 관계로 시끄러운 세태를 반영하기에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개개인이 세상만사를 모두 경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알고 있다고 믿는 대부분의 것들은 내가 경험하면서 체득한 것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통해서 얻은 간접경험이거나 정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진실여부를 떠나서 개개인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 상당수가 어찌 보면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을 자신의 편향된 렌즈를 통해 믿고 싶은 것들만 걸러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전혀 그런 것에 대해 인식조차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는 턱도 없이 강한 어조로 자신의 말만이 옳다고 주장하거나 타인의 의견을 너무 쉽게 매도해 버리는 대단히 오만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거짓 뉴스가 횡행하는 나라에서 손가락 몇 번 깔딱거려 얻은 인터넷 검색정보를 가지고 어찌 그리 당당하게 말들을 하는지 경악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부류의 인간이 어떤 사주를 받아 작성한 정보인지에 대한 분석이나 고민도 없이 말이다. 심지어는 무지렁이들이 타인의 건강에 관한 조언(?)까지 서슴지 않는 걸 보면 아연실색할 때도 있다. 실제로, 코넬대학의 교수였던 더닝과 크루거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밝혀내기도 했다.

​  만약 코끼리와 냉장고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삼단계의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이 제법 그럴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가 실생활에서 하고 있는 대화중에도 이런 식의 얘기가 없으란 법도 없다. 의미를 두지 않는 잡담으로 치부하면 그만이긴 하지만, 때로는 기억으로 남아 사실인양 믿고 있는 게 문제이다.

​  면역은 우리 몸을 지키는 방패이다. 크게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선천면역과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획득면역으로 구분된다. 획득면역은 또 다시 항체를 형성하여 기능하는 체액성 면역과 흉선에서 유래한 T림프구에 의한 세포성면역으로 구분한다. 면역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은 ‘자기’와 ‘비자기’를 제대로 구분하여 비자기를 적절하게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비자기는 외부에서 침입한 병원균 뿐 만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만들어진 체내세포들도 포함된다. 건강한 상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항상 적절한 면역력이 유지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와 비자기를 효율적으로 감별하여야만 한다. 냉장고 문을 열고 코끼리를 집어넣듯이 말은 쉽다. 문제는 비자기와 자기를 어떻게 감별해 내느냐의 난해함이고, 미세단계에서의 복잡 미묘한 조절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  그 동안의 연구로 괄목할 만한 성과들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고 어마어마한 의학지식들이 쌓여 가지만, 다른 인체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면역계에 관해서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들은 무궁무진하다. 출간된 지도 오래된 편이고, 두께도 얇은 편인 이 책을 읽다보니, 면역계에 대한 내 지식이 얼마나 ‘코끼리 냉장고에 집어넣기’식의 우스꽝스러운 것 이었는가 새삼 부끄러운 맘이 들었다.

   끊임없이 보고 듣고 느끼는 내 신경계에 의해 형성된 의식세계가 나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 왔는데, 의식세계는 실은 수 만년에 걸쳐 쌓아온 정보들이 만들어 낸 내 몸속의 유전자가 내세운 바지사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과학과 철학의 경계가 애매모호해지는 잡념의 단초를 제공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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